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재위 8년에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전쟁 과정에서 획득한 땅을 식읍으로 나눠 주었다. 당시 귀족들은 식읍 외에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녹읍도 받았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식읍이나 녹읍으로 받은 지역에서 귀족은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뒀을뿐더러, 그들을 노역에 동원할 수도 있었다. 아울러 퇴임 후에도 해당 지역을 관리했으며, 사망 후에도 세습도 가능했다. 이러한 귀족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신문왕은 재위 7년에 세금을 거두되 노역 동원이나 퇴임 후 보유 및 세습을 할 수 없는 관료 전을 차등 지급했다. 그리고 2년 뒤부터는 녹읍을 없애고, 해마다 곡식을 받는 세조를 차등 지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귀족들의 반발로 경덕왕 16년에 이르러 녹읍이 다시 부활했다.
일반 농민들의 경우는 성덕왕 21년에 국가에서 정전을 지급했는데, 지급 대상자인 정은 대체로 16세 이상부터 59세 이하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치는 백성들의 사유지를 법적으로 추인하거나, 사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유지의 경작권을 주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통일 과정에서 협력과 대결 구도를 펼친 당나라와는 다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양국 간에 활발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신라는 당나라에 금은 세공품이나 직품 공예품, 말, 모피, 향유, 우황, 피혁, 인삼 등을 수출했다. 그리고 당나라로부터는 각종 공예품이며 견직물, 서화, 자기, 칠기, 차 등을 수입했다.
신라는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역했는데, 그 품목은 향료와 약물, 묵, 종이, 금속품, 악기, 염료 등이었다. 그중 향료의 경우는 상당수가 남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인도, 혹은 멀리 아라비아에서 생산된 것들이었다. 공적인 부문에서 일본과의 교역은 신라 하대가 시작될 무렵에 단절되었지만, 9세기 초반부터 신라 상인들은 일본과의 사적인 교육을 본격화했다. 이는 828년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가 중국 동남부 해역의 재당재다 신라인 지역과 일본 다자이후를 연결하는 등 당대의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결과였다. 이후 신라 하대의 권력 쟁투로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해산되자, 재다 신라인들은 신라를 경유하지 않고 남로를 통해 일본과의 직접적인 교류에 나서게 되었다.
신라 왕실의 장법은 전통적으로 커다란 왕릉을 조성하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 식이었다. 이러한 전통 장례법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불교였다. 삼국을 통합한 문무왕이 죽자 불교식으로 화장했는데, 지금의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효성왕의 경우도 화장해서 동해에 골분을 뿌리도록 했으며, 선덕왕과 원성왕, 진성여왕, 효송왕, 신덕왕 등도 화장 방식을 택했다. 신라 불국 토설을 믿고 강조했던 신라 왕실은 많은 불교 관련 유물을 제작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성덕대 왕신 종이다. 흔히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이 범종은 경덕왕이 선왕인 성덕왕을 기릴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해 다음 왕인 혜공왕 6년에 완성한 것으로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 관련 유물 중에는 경덕왕 때 집사부 중시였던 김대성의 불사로 조성된 석불사와 불국사 등 귀족들이 조성한 것들도 적지 않다.
통일신라의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는데, 초기인 중대에는 교종이 유행하고, 후기인 하대에는 선종이 유행했다. 신라 중대는 불교 신앙의 대중화가 전개된 시기로, 교종의 법상종과 화엄종이 크게 활약했다. 먼저 법상종은 교학과 실천을 강조하는 태현계와 실천 쪽을 더 강조하는 전표계로 갈라진다. 태현 계는 경덕왕 때 경주 등 중앙을 무대로 활동한 반면, 진표 계는 보다 후대에 지방을 무대로 활약했다. 다음으로 화엄종은 의상계와 원효 계로 나누어지는데,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통해 화엄사상을 배우고 화엄학의 핵심을 정리, 해석한 <화엄 일승 법계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와서는 태백산의 부석사, 가야산의 해인사, 금정산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계룡산의 갑사 등 화엄 10찰을 세웠다.
원효는 일심과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당대의 대다수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를 써내는 등 불교 경전 연구에도 공을 들였는데, 그의 저술 가운데 <대승기신론소>와 <금강 삼매 경론>은 중국 불교계의 사상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하대에 유행한 선종은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호적들이 성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경전보다는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했으며, 대다수 승려들은 6두품 이하의 하급 관료나 중앙 진출이 어려운 지방 호족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당시 선종 사찰들 중에는 지방 호족의 후원 아래 넓은 규모의 장원을 경영하는 곳도 있었다. 불교가 사상적으로 대세를 이룬 가운데, 유학은 정책적으로 장려되었다. 교육기관인 국학과 관리 선발 제도인 독서 삼품과 등의 교육제도 실시로 유학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늘었다. 그리고 성덕왕 18년에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 철 및 72 제자의 화상을 가져오는 등 유학 발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중교 외적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 활동에는 진성여왕 2년에 각간 위홍이 대구화상과 함께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를 수집해 <삼대 목>이란 향가집을 편찬한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통일신라에서는 이름난 서예가들이 다수 활동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생과 요극일을 들 수 있다. 김생은 ‘해동의 서성’이라 불리며, 왕휘지 체를 바탕으로 특유의 개성적인 서체를 구사했다. 8세기경에 활약한 그의 능란한 서체는 낭공대사백월 서운 탑비, 구례 화엄사의 화엄석경, 서첩인 <전유 암산 가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김생에 버금가는 명필로 평가받은 요극일은 그보다 좀 늦은 시기인 9세기경 사람으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힘찬 필력을 보여 주었다. 황룡사 9층 목탑 찰주 본기를 비롯해 적인선사 탑비 문과 삼랑사 비문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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