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신라 정치의 발전과 영토의 확장

유주사랑 2020. 6. 24. 23:12

신라 지도

신라는 왕에 대한 호칭이 시기별로 변화해 왔다. 먼저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의 경우에는 ‘거서간’이라는 왕호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진한 말로 임금이라는 뜻을 가진 용어였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은 남해왕에게는 ‘차차웅’이라는 왕호가 붙었는데 이는 무당이라는 뜻의 용어였다. 당시 왕한테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3대 유리왕부터는 ‘이사금’이라는 왕호를 사용했는데, <삼국사기>에는 제18대 실성왕까지, <삼국유사>에서 제16대 홀해왕까지 썼다는 각기 다른 기록이 전한다. 그다음에 쓴 왕호는 ‘마립간’인데, 여기서 ‘마립’이란 말뚝을 뜻하는 것으로 왕 아래 신하들이 죽 늘어선 자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립간의 최고 지배자의 의미로 쓰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왕호인 이사금이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로서의 의미라고 해석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이라는 왕호가 각각 제19대 눌지왕에서 제22대 지증왕까지, 제17대 내물왕에서 제22대 지증왕까지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증왕 재위 당시 중국식으로 바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왕호의 변화는 왕권 강화뿐 아니라 국력의 신장도 반영하고 있다. 신라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던 주변 정치 집단에 대한 정벌이나 복속 작업이 일단락된 시기는 대략 3세기 중엽으로 보인다.

 

내물왕 시기에 신라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고초를 겪었다. 내물왕 5년에는 나라 안으로 들어온 왜구를 쫓아내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군사적 도움은 정치적 간섭으로 이어져, 이후 신라 눌지왕은 백제와 나제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신라라는 국호를 처음 쓴 시기는 지증왕 4년으로, 마립간 대신에 국왕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에 힘쓴 지증왕은 전래된 악습인 순장을 금지시키는 한편, 생산력 증대를 위해 우경을 보급했다. 또한 지방을 주와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성과 촌을 두는 등 행정구역을 정비했다.

 

지증왕

 

제 23대 왕으로, 지증왕의 업적을 상속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국방 체계의 정비와 강화를 위해 병부를 설치하고, 왕권 보좌를 위해 상대등을 신설했다. 그리고 재위 15년에는 사상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공인했으며, 재위 23년에는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탈해왕 때의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병합을 비롯해, 파사왕 때의 음즙벌국과 실직국, 압독국,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정벌, 벌휴왕 때의 소문국 점령, 조분왕 때의 감문국과 골벌국 정복, 점혜왕 때의 사벌국 장악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된 5세기 중반 이후, 신라는 변방 지역에 성곽을 쌓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 때 11곳, 소지왕 때 5곳, 지증왕 때 12곳에 산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방어적인 활동 외에 신라는 대외 정복 활동도 계속해 나갔다. 지증왕 13년에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울릉도를 복속하고, 법흥왕 19년에는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또한 진흥왕 11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다 지친 틈을 타 두성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거칠부가 죽령 이북과 고현 이내의 고구려 10개 군을 탈취했으며, 다시 2년 후인 553년에는 백제의 동북면을 공격해 한강 하류의 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 성왕이 가야와 왜의 군대를 끌어들여 신라의 관산성을 협공하는 등 보복전에 나섰으나, 복병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으로 이어온 120년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버렸다. 진흥왕은 재위 16년에 확장된 신라의 영토를 확인하고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는 한편, 남양만 지역에 당항성을 쌓아 중국과의 안정적인 교류를 꾀했으며, 재위 23년에는 대가야를 공략해 무너뜨렸다. 세력확장을 경계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과 성왕의 전사로 주적이 된 백제와의 지속적인 전투에 대한 부담감으로 신라는 당나라에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진흥왕 순수비

당이 그 요청에 화답해 군대를 파병한 것은 신라 태종무열왕 7년의 일이었다. 이때 김유신의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백제군을 제압하고,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기벌포에 상륙해 백제의 왕도인 사비성을 공략했다. 나당연합군의 기세에 눌린 백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한편 고구려는 권력자인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지배층이 분열했다. 고구려는 그 틈을 노려 공격해 들어온 나당연합군을 맞아 분전했으나, 이탈하거나 배신하는 세력들이 생겨나는 가운데 보장왕 27년에 끝내 멸망했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해당 지역뿐 아니라 백제의 옛 땅도자기 지배 아래 두려고 시도했다. 당나라와의 사전 밀약을 통해 평양 이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기로 했던 신라는 당나라에 반발해 군사적 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끌어들여 당나라와 벌인 전쟁은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시작되어 676년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