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28

계유정난 발발

계유정난 발발 문종 2년(1452) 5월 18일, 문종이 죽고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도 없고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 원로대신들이 대비의 역할을 대신했다. 관리를 임명하거나 파면할 때. 의정부의 삼정승이 대상자의 이름 위해 노란 표시를 해서 올리면 그대로 처결된다 해서 '황표정치'라는 말이 생겼다. 당시 조정은 의정부의 원로대신들과 집현전 출신 학자들로 대치되는 신료 세력에다 수양대군과 인평대군으로 대표되는 종친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원로대신들은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안평대군과 연대했다면, 권력을 틀어쥔 원로대신들에게 반발한 집현전 학사들은 수양대군과 가까이 지냈다. 초기에는 원로대신과 안평대군 세력이 수양대군 세력에 대해 우위를 차지했다. ..

한국역사 2020.11.23

문종의 치세

세종이 재위 32년(1450)에 숨을 거두자, 첫제 아들인 문종이 조선의 제5대 왕으로 즉위했다. 1421년부터 왕세자로 지내 온 29년 동안 문종은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관대한 언론 정책으로 민심을 살피는 등 부왕인 세종의 치세를 도왔다. 재위 말년에는 각종 질환에 시달린 탓에 업무 부담을 덜고자 하는 세종의 명으로 대리청정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문종은 부왕을 대신해 5년 동안 국정을 운영하다가 왕위에 올랐다. 한마디로 준비된 왕이었던 문종은 즉위 후에도 세종조의 정책을 일관되게 안정적으로 추진했다. 세자 시절부터 진법 관련 서적인 을 편찬하는 등 군사문제에 조예가 깊었던 문종은 즉위 후 중앙군인 좌군, 우군, 중군 등 3군을 12사에서 5사로 바꾸는 군제 개편을 단행했다. 부대의 수를 줄이는 대신..

한국역사 2020.11.20

세종의 문치주의, 대마도 정벌과 사군육진 개척에 대해서..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은 상왕인 태종이 거머쥐고 있었다. 그는 새 왕에게 병권을 넘기지 않는 자신의 처사에 불평했다는 이유로 세종의 장인인 심온 등을 붙잡아 사사했다. 세종 2년의 일이었다. 이처럼 외척 세력의 발호를 철저히 경계했던 태종이 1422년에 숨을 거두자, 비로소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전체적인 철권통치를 밀어붙인 태종과 달리, 세종은 문치주의에 입각한 안정적인 유교적 통치를 펼쳐나갔다. 세종의 문치를 뒷받침했던 것은 1420년 3월에 설치한 집현전이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 10명에서 나중에 32명까지 늘어났다가, 세종 18년에 20명으로 줄어들어 고정되었다. 그 20명 중 절반은 경서 연구를, ..

한국역사 2020.08.04

한양천도와 1,2차 왕자의 난

1392년 7월 무너진 고려의 사직 위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전 왕조의 주인인 왕씨들을 따로따로 귀양 보냈다가 한 배에 태워 바다에서 수장시키는 잔혹함을 보였다. 또한 경기도 광덕산 계곡의 두문동 마을에 은거한 고려의 유신들을 끌어내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질렀다가 모두 타 죽게 하는 과오도 저질렀다. 이런 잔혹한 처사 때문에 명나라 태조가 사문사를 보내 진상을 알아 오도록 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대책 마련을 위해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고려와 악연을 쌓은 태조는 개경을 벗어나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의 궁실을 수리하는 등천도 준비를 했으나,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히면서 중단되었다. 그러다 천도론이 다시 제기되면서 도읍으로 정해진 곳은 한양이 아..

한국역사 2020.08.02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우왕 14년, 명나라 태조는 철령, 이북, 이동, 이서의 땅이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곳이므로 철령위를 설치해 명의 직할지로 삼겠다는 뜻을 고려에 전해 왔다. 격분한 최영은 모든 관리들을 불러 명의 조치에 반대한다는 중론을 이끌어 낸 다음, 우왕을 만나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에 우왕은 원나라식 관복을 부활시키는 등 반명 노선을 뚜렷이 하는 한편, 그해 3월에는 8도에 명하여 군사들을 모으게 했다. 그간 왜구의 수탈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들로서는 농사철을 앞두고 장정을 징발하는 데 대해 원성을 쏟아냈다. 무리한 원정이라 판단한 이성계는 요동 정벌 불가론을 설파하며 우왕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4월 18일, 5만여 명의 원정군은 우군도통사인 이성계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의 통솔 ..

한국역사 2020.07.31

공민왕의 최후와 이인임의 득세 그리고 이성계의 활약

한때 신돈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공민왕은 신돈의 비첩 반야에게 반해 1365년 아들까지 낳았다. 신돈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공민왕은 당시 8세이던 아들을 데려다가 세자로 삼으로 했다. 하지만 비빈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태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민왕은 이미 '모니노'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아들에게 새로 '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우의 어미는 죽은 궁인 한씨라고 대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우의 어미가 신돈의 첩인 반야였다는 사실은 평생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한편, 공민왕은 재위 21년에 궁중에 자제 위를 설치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들을 뽑아 자신의 좌우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들과 문란한 성적 유희를 즐겼다. 이러한 동성애는 충선왕 때부터 궁중에서 유행한 것으로 용양..

한국역사 2020.07.29

공민왕의 개혁 정치 및 신돈의 등장

충정왕 3년(1351) 12월,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귀국한 공민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원나라는 순조의 치세로 잦은 황제 교체와 공위 사태 등 그간의 국정 혼란을 극복한 듯했으나, 잇따른 실정과 천재지변으로 민생과 치안이 악화되면서 각종 반란이 일어나고 홍건적의 대란까지 터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밝았던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변발과 호복 등을 과감하게 고려식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고려의 것을 되찾고자 하는 공민왕의 의지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친원 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날개를 펴기 어려웠다. 그 중심에는 원에 바쳐진 공녀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씨의 형제들인 기철, 기원 등이 있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원에 머물 때 시종 하면서 그곳 관료들과 쌓은 친분 덕분에 위세를 부리는 조일신 등도 ..

한국역사 2020.07.27

삼별초의 항쟁 및 원의 내정간섭

무신 정권이 붕괴되자, 고려 조정은 개경 환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무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환도가 결정된 가운데, 1270년 5월 27일 원종이 개경으로 입성했다. 몽골에서 돌아온 왕을 맞이하기 위해 대다수 왕실 사람들과 중신들의 환도를 한 상황이었다. 그 무렵 환도 결정에 반발하며 무기고를 열어젖힌 삼별초에 대해서 원종은 해산 조치를 내리려 했다. 이에 삼별초의 수장인 배중손은 6월 1일 강화도에서 왕족인 승화 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1220년경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조직한 야별초라는 사병 집단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조직이 커지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게 되었고, 여기에 몽골군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구성된 신의군이 추가되면서 삼별초란 이름을..

한국역사 2020.07.25

최씨 정권, 무인시대의 종말

강화도 천도를 통해 자신의 권세를 안정적으로 이어간 최우는 고종 36년(1249) 11월에 병사했다. 최우의 병이 깊어지는 와중에 그의 아들인 최항은 군을 통제하고 경계를 강화함으로써 무사히 정권을 승계했다. 권력을 장악한 최항은 자신의 반대파들을 숙청했을뿐더러, 아버지의 측근들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최항은 최우처럼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몽골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고종 37년(1250) 1월에는 육지로 나오라는 몽골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면서 강화도 북쪽에 새 궁궐인 승천부를 짓기도 했다. 고종 22년(1235)부터 개시된 몽골의 3차 침입은 고종 26년(1239)까지 진행되었다. 이때 경주의 황룡사 9층탑이 소실되는가 하면, 강화도에서는 대장경 조판이 이루어졌다. 이즈음 몽골에서는 황..

한국역사 2020.07.23

최우의 정방 정치와 몽골의 침입

23년간 고려를 쥐락펴락해 온 최충헌이 숨을 거두자, 권력은 그의 아들인 최우의 손에 쥐어졌다. 최우는 부친인 최충헌에게서 물려받은 다량의 금은보화를 고종에게 바치는 한편, 부친이 부당하게 차지한 땅도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토색질을 일삼던 지방관들을 적발해 처벌하기도 했다. 이렇듯 최우는 일련의 참신한 정책으로 인심을 얻었으나, 자신의 부친처럼 세도를 즐기고 사치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최우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 주는 일화들이 있다. 고종 13년(1226)에 최우가 발에 종기가 나서 앓게 되었다. 그때 고위직에서 말단까지 모든 관리들이 최우의 완쾌를 비는 재를 올리면서 소지를 불사르는 통에..

한국역사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