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은 상왕인 태종이 거머쥐고 있었다. 그는 새 왕에게 병권을 넘기지 않는 자신의 처사에 불평했다는 이유로 세종의 장인인 심온 등을 붙잡아 사사했다. 세종 2년의 일이었다. 이처럼 외척 세력의 발호를 철저히 경계했던 태종이 1422년에 숨을 거두자, 비로소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전체적인 철권통치를 밀어붙인 태종과 달리, 세종은 문치주의에 입각한 안정적인 유교적 통치를 펼쳐나갔다. 세종의 문치를 뒷받침했던 것은 1420년 3월에 설치한 집현전이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 10명에서 나중에 32명까지 늘어났다가, 세종 18년에 20명으로 줄어들어 고정되었다. 그 20명 중 절반은 경서 연구를, 나머지 절반은 문학 연구를 담당했다. 세종은 자신의 영속적인 업적이랄 수 있는 훈민정음 창제에서도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 글의 사용을 반대하는 최만리, 김문, 정창손 등을 잡아 가두는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어렵사리 보급한 훈민정음으로, 당시 문맹 상태였던 대다수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종 27년, 정인지와 권제 등이 조선 왕조의 창업을 노래한 서사시인 <용비어천가>를 왕명으로 편찬했는데, 이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시가에 해당한다. 그리고 4년 후에는 세종이 손수 지은 한글 불교 찬가인 <월인천강지곡>도 선보였다. 한글 창제 외에도 천문학, 역학, 농업, 의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세종은 찬란한 업적을 쌓았다. 천체의 움직임이나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해,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와 수표 등을 만들어 조선의 천문과 기상을 관측했다. 또한 중국의 역법과 이슬람의 역법을 수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서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각각 만들었다. 농업 분야에서는 토착적인 농사 개술의 개발을 위해 1429년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이는 중국의 농서를 참조하되, 전국 각지의 경험 많은 농부들에게서 농사 경험담을 채록해서 엮은 농서로 이후 판을 거듭하며 새로운 농법들이 소개되었다. 세종 15년에는 조선 땅에서 생산되는 약재인 향약과 한방 치료법을 모은 <향약집성방>이 왕명으로 편찬되었다.
또한 민간에서 채취하는 향약의 명칭을 목록화하고 그 맛과 성질과 채취 시기 등을 수록한 <향약채집월령>도 왕명으로 빛을 보았다. 그리고 중국의 한, 당, 송, 원, 명에 걸친 164종의 고전 의서를 수록한 <의방유취>도 편찬되었는데, 이는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 때에는 고려 궁중 의식에서 연주된 중국 음악인 아악과 삼국시대 이래로 전해 온 우리 전통 음악인 향악을 정비했다. 아악의 정비를 주관한 인물은 박연으로, 당시 불완전했던 악기 조율을 정리하는 한편,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를 개량하여 성능을 크게 높였다. 그리고 정비된 아악과 향악을 표현하는 새로운 악보로, 세종에 의해 정간보가 만들어졌다. 그밖에도 세종은 농잠 관련 서적 간행을 비롯해, 환곡법의 철저한 시행, 조선통보 주조, 전제상정소 설치를 통한 공정한 전세 제도 확립 등 민생 안정에 공을 들였다. 또한 무기 제조 및 병선 개량과 벙서간행 등 국방력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한편으로 1424년 4월에는 태종에 이어 다시금 불교 개혁을 단행했다. 그해 2월 홍천사에서 터진 음주와 공금 횡령 사건이 단초가 되었는데, 세종은 당시 7종이었던 불교 종파를 천태종과 조계종 등 2종으로 통합하고, 전국의 사찰을 양대 종파에 18사씩 총 36사만 남기고 모두 없애 버렸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사찰 재산을 국고로 환수할 수 있었다.
세종 원년 6월, 이종무가 지휘하는 정벌군이 대마도를 향해 출항했다. 이미 고려 창왕 원년 1월 박위와 태조 5년 12월 김사형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데 이은 세 번째 정벌이었다. 전함 227척을 타고 바다를 건넌 정벌군 1만 7천여 명은 대마도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규슈의 제후들이 총동원되어 대마도를 방어했던 까닭에 섬 전체를 토벌하지는 못했으나, 원정군은 왜구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왜구의 소탕에 성공한 조선은 세종 25년에 수차례 통교를 간청해 온 대마도주와 조약을 맺고 삼포를 개방했다. 아울러 삼포와 서울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들에게 제한적인 숙박과 무역을 허용했다. 이처럼 정벌과 교육이라는 강온 전략을 통해 조선은 왜구의 준동을 가라앉혔다. 대마도 정벌 이후, 세종은 북쪽 변방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야인들의 토벌에 나섰다. 먼저 세종 15년 평안도도절제사 최윤덕에게 군사 1만 5천여 명을 주어 서북면에 자주 출몰하는 여진족을 치게 했다.
이후에도 준동하는 여진족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압록강 상류 지역에 군사요충지인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등 4군을 설치했다. 세종 17년에는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해 동북면 지역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을 정벌하게 했다. 당시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들 중에서 가장 큰 부족인 오도리족과 우디거족 사이의 내분을 틈타 김종서는 종성진, 온성진, 회령진, 경원진, 경흥진, 부령진 등 6진을 구축했다. 세종 시대의 조선은 대마도 정벌로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던 남부 지역의 안정을 도모했을뿐더러, 여진 정벌을 통해 북방 지역의 평화도 달성했다. 특히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조선의 북쪽 경계를 확실하게 두만강과 압록강 지역까지 밀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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