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무너진 고려의 사직 위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전 왕조의 주인인 왕씨들을 따로따로 귀양 보냈다가 한 배에 태워 바다에서 수장시키는 잔혹함을 보였다. 또한 경기도 광덕산 계곡의 두문동 마을에 은거한 고려의 유신들을 끌어내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질렀다가 모두 타 죽게 하는 과오도 저질렀다. 이런 잔혹한 처사 때문에 명나라 태조가 사문사를 보내 진상을 알아 오도록 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대책 마련을 위해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고려와 악연을 쌓은 태조는 개경을 벗어나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의 궁실을 수리하는 등천도 준비를 했으나,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히면서 중단되었다. 그러다 천도론이 다시 제기되면서 도읍으로 정해진 곳은 한양이 아닌 계룡산 아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준비 과정에서 계룡산 일대가 도읍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나와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새 도읍지로 거론된 곳은 오늘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과 신촌동 지역인 무악 남쪽 땅으로, 역시나 도읍으로 삼기에는 좁다는 반대 주장에 부딪혔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항을 거듭하던 도읍지 선정은 결국 북악산 아래쪽 땅으로 낙점되었다.
태조 3년 8월 13일, 천도를 위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제일 먼저 완공된 것은 경복궁으로 그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이었다. 경복궁 안에서 임금이 나아가 조회하는 정전은 근정전이라 불렀으며, 궁궐 문의 경우에는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영추문, 남문은 광화문, 북문은 신무문으로 작명했다. 태조 5년부터는 도읍을 에두르는 성곽을 쌓았는데, 완공하는데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인마와 물산의 통행을 위한 4개 대문으로 동쪽에는 홍인문을 내고, 서쪽에는 돈의문을 텄으며,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숭례문과 숙청문을 세웠다. 그리고 4개 소문으로 동북쪽에는 혜화문, 서북쪽에는 창의문, 동남쪽에는 광희문, 서남쪽에는 소의문을 마련했는데, 수구문이나 시구문으로도 불렸던 광희문 서소문으로 불렸던 소의문으로는 죽은 이의 시신이 빠져나갔다. 천도하고 5년이 지난 1399년에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은 왕자의 난으로 형제간에 골육상쟁의 피를 뿌린 한양에서 구도인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개경에서도 또다시 왕자의 난이 발발하자, 동생인 방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이로써 조선의 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정도전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각종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천도를 위한 한양 건설 기획과 공사에서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조정의 여러 요직을 겸임하면서 병권까지 틀어쥔 그는 병서인 <진법>, <강무도>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아울러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효시가 되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했을뿐더러, 경세서인 <경제 의론>과 불교 비판 철학서인 <불씨잡변> 등도 저술했다. 한편, 조선 건국에 공헌한 또 다른 인사인 이방원은 여러 측면에서 정도전과 갈등했다. 왕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사대부가 중심이 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 혁파는 개인적으로 무장 집단을 거느렸던 이방원 등 왕실 세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정도전은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여 태조의 죽은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 여섯 형제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 방석 중에서 8남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씨 소생의 형제들, 특히 방원은 자신의 안위와 야심을 위해 정도전 제거에 나섰다.
태조 7년 8월 이성계가 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동안, 방원은 안산군수 이숙번이 이끄는 별초군의 도움을 받아 남은의 소실집에서 정도전 일파를 살해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붙잡아 목숨을 빼앗고 그 형인 방번도 제거하는 등,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의 성공으로 주도권을 잡은 방원은 자신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는 측근들의 뜻과 달리,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형인 방과가 세자가 되도록 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9월에 방과는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방과, 즉 정종은 재위 2년 3월에 왕자의 난으로 피를 뿌린 한양을 떠나 개경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넷째 왕자인 방간이 군사를 일으켜 방원과 혈전을 벌이는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왔던 지중추원사 박포가 논공행상에 대해 불평하다가 귀양까지 가게 되자, 정종 2년 1월 방간의 난에 가담했다. 방원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운 이는 이숙번으로, 선죽교 인근에서 시작되어 주변으로 옮겨 가며 진행된 양측 간의 전쟁은 방원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난의 진압 후에 박포는 죽임을 당하고, 방간은 귀양 조치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는 권한을 수중에 거머쥐었다. 또한 그해 11월 13일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즉위 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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