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신돈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공민왕은 신돈의 비첩 반야에게 반해 1365년 아들까지 낳았다. 신돈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공민왕은 당시 8세이던 아들을 데려다가 세자로 삼으로 했다. 하지만 비빈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태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민왕은 이미 '모니노'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아들에게 새로 '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우의 어미는 죽은 궁인 한씨라고 대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우의 어미가 신돈의 첩인 반야였다는 사실은 평생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한편, 공민왕은 재위 21년에 궁중에 자제 위를 설치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들을 뽑아 자신의 좌우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들과 문란한 성적 유희를 즐겼다. 이러한 동성애는 충선왕 때부터 궁중에서 유행한 것으로 용양이라는 이름으로 몽골에서 전해졌다. 공민왕은 용양을 즐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비빈들에게 자제위 출신들과 억지로 자게 만들어 왕자를 얻으려 했다. 정비와 혜비, 신비 등이 한사코 거부한 탓에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익비는 공민왕이 칼로 위협하면서까지 김흥경, 홍윤, 한안 등과 자게 만들었다.
1374년 9월 21일, 익비가 홍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공민왕은 사건의 진상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할 목적으로 홍윤은 물론이고 그 사실을 전한 환관 최만생까지 죽이고자 했다. 이에 놀란 최만생은 홍윤, 한안 등과 짜고 밤중에 침전으로 들어가 공민왕을 시해했다. 외부에서 침입한 자객의 소행인 것처럼 꾸민 최만생 등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죄상이 탄로 나 모두 역적의 죄로 처형당했다. 공민왕의 유해는 노국대장공주의 능 옆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공민왕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즈음,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명을 건국해 드넓은 중원 땅을 차지하고, 몽골 지역으로 쫓겨 간 원의 잔족 세력들은 북원 시대를 열었다. 신흥 강국인명과 제국의 명맥을 이어가는 북원 사이에서 고려는 양다리 외교를 구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은 공민왕의 아들인 우가 1374년 9월 제32대 왕으로 즉위했다. 우왕이 신돈의 비첩인 반야의 아들이라는 출신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즉위할 수 있었던 데는 이인임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이인임은 공민왕 17년 좌시중으로 등용되어 우왕 13년 노환으로 수상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19년 동안이나 재상의 지위를 유지한 인물이었다. 당대 고려 최고의 권신이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힘센 신하의 후원으로 왕이 되기는 했지만, 명과 북원을 상대로 한 외교 관계가 꼬이면서 왕위 계승을 추인받기가 쉽지 않았다. 우왕 즉위 초, 명에 공물로 바칠 말을 호송하던 관리가 명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여파로 명 황제는 우왕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 내부에서도 우왕이 선왕인 공민왕의 친자가 아닐 수도 있다며 왕위 계승에 대한 시비가 계속되었다. 게다가 북원에서는 심왕고의 후손인 탈탈불화가 고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명 황제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인임은 북원으로 사자를 보내 우왕 즉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당장 조정의 친명파들이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이인임은 그중 가장 크게 반대하는 정도전을 귀양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끝내 북원 황제의 승인을 받아 우왕의 즉위를 공식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확정한 우왕은 학문보다는 말달리기와 매사냥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성정이 잔인해서 시종들 중에서 눈에 거슬리는 자는 함부로 죽이곤 했다. 그리고 호전적인 기질도 다분해 요동 정벌에 대한 의지도 드러내었다. 우왕을 세운 공로로 권세를 틀어쥔 이인임은 청렴하고 강직한 이들을 멀리한 채, 자신의 수족 같은 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두루 배치했다. 그렇게 큰 세력을 형성한 이인임 일파는 권력을 농단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워 나갔다. 우왕은 잔학한 행동들은 집권 세력의 의도적인 묵인 아래서 자행된 측면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이인임 일파의 만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최영과 이성계는 이듬해 1월 무력을 동원해 조반과 그의 가족을 구해내고, 이인임을 위시한 그 세력들을 쓸어버렸다. 유배형에 처해진 이인임은 지금의 경북 성주 지역에 있던 경산부에 안치되었다가 곧 사망했다. 그렇게 당대 최고 권신의 20년 세도도 쓸쓸히 막을 내렸다.
고려 말 신흥 군벌 세력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성계는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지역인 화령부가 고향인 북방 출신의 무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고조부인 이안사 때 함경도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이안사가 원에 귀화하면서 원나라 백성으로 살던 이성계 집안이 다시 고려인으로 벼슬살이까지 하게 된 것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때였다. 당시는 공민왕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의 땅을 수복코자 애쓴 시기로, 동녕부에 터 잡고 사는 이자춘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북면상만호라는 관직을 제수했다. 이자춘 사후에 벼슬을 상속받은 이성계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공민왕 11년 정월 홍건적이 장악한 개경을 탈환하는 데 일조하고, 같은 해 국경을 넘어온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군대를 함흥평야에서 격퇴한 데다, 동북면으로 들어와 기세를 떨치던 여진족도 섬멸했다. 고려의 권력 지형은 권문세족을 대변하는 최영의 군벌 세력과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의 신흥 군벌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대외 관계에서도 각각 친원과 친명으로 성격을 달리했던 두 군벌은 명의 철령위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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