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공민왕의 개혁 정치 및 신돈의 등장

유주사랑 2020. 7. 27. 10:18

공민왕

 

충정왕 3년(1351) 12월,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귀국한 공민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원나라는 순조의 치세로 잦은 황제
교체와 공위 사태 등 그간의 국정 혼란을 극복한 듯했으나, 잇따른 실정과 천재지변으로 민생과 치안이 악화되면서 각종 반란이 일어나고 홍건적의 대란까지 터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밝았던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변발과 호복 등을 과감하게 고려식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고려의 것을 되찾고자 하는 공민왕의 의지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친원 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날개를 펴기 어려웠다. 그 중심에는 원에 바쳐진 공녀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씨의 형제들인 기철, 기원 등이 있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원에 머물 때 시종 하면서 그곳 관료들과 쌓은 친분 덕분에 위세를 부리는 조일신 등도 존재했다.

 

기철 형제와 불화했던 조일신은 공민왕 원년(1352) 6월 거사를 일으켜 한림학사로 재직하던 기원을 살해했다. 미처 죽이지 못한 기철의 무리를 쫓는 한편으로 궁궐을 장악한 조일신의 무리는 공민왕에게서 국왕인을 빼앗아 자기들 마음대로 관직을 나눠 가졌다. 이에 공민왕은 전횡을 일삼는 무리를 처벌하라는 조정 중신들의 뜻을 받아들여 조일신 등을 추포해 목을 베었다. 전격적인 진압 작전으로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공민왕이 배원 정책을 펼쳐나가자, 공민왕 5년에 기철을 위시한 노책, 권겸 등은 반란을 모의했다. 친원 세력의 역모를 간파한 공민왕은 연회를 열고 초청받아 입궁한 기철과 권겸을 죽인 후, 입궁하지 않는 노책에게는 집으로 사람을 보내 마저 죽였다. 친원파 거물들을 제거하고 그 세력도 흩어 버린 공민왕은 원의 연호와 관제를 버리고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원의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쌍성총 관부를 없애 고려의 영토를 회복했다.

 

공민왕 부부상

 

공민왕의 개혁 정책으로 고려가 중흥을 꾀하던 무렵, 남쪽 지방은 왜구의 노략질에, 북쪽 지방은 홍건적의 침입에 노출되었다. 공민왕 8년(1359)과 10년에 각각 의주와 개경을 함락한 홍건적 때문에 고려가 입은 피해는 특히 막대했다. 홍건적의 난이 이성계 등 무장들의 활약으로 평정된 다음, 환도 중에 잠시 머물던 경기도 개풍의 흥왕사란 절에서 공민왕은 역심을 품은 김용이 보낸 부하들에게 시해당할 위기를 겨우 벗어나기도 했다. 난이 진압된 후 발뺌하던 김용은 죄상이 발각되면서 사지가 찢겨 죽었다. 그리고 공민왕 13년 1월에는 기황후의 뜻을 받든 최유가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가 최영과 이성계의 고려군에게 폐퇴한 일도 있었다. 이후 양국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원황제로부터 공민왕은 최유를 넘겨받아 처형했다.

 

공민왕이 훗날 신돈으로 불리게 된 편조를 처음 만난 것은 재위 7년의 일이었다. 당시 공민왕은 유학자들로 구성된 관료 체제가 아닌, 불교 관련 세력을 활용한 새로운 개혁 정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한 공민왕의 구상에 적합한 인물로 편조가 부각되었다. 그는 지금의 경남 창녕 지역에 속해 있던 계성현 옥천사 여비의 자식으로 어려서부터 중이 된 인물이었다. 편조는 궁궐을 드나들면서 공민왕의 신망을 쌓았으나, 배척하고 경계하는 인사들이 많았던 탓에 공민왕 13년에 와서야 정치일선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숨을 거두자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편조에게 국정을 맡겨 버렸다. 힘을 얻은 편조는 자신을 추종하는 인사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그에게 미운털이 박힌 인사들은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 과정에서 최영도 경주의 행정 책임자인 계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유배까지 가게 되었다.

 

신돈

 

조정에서 편조의 수족을 자처하는 무리가 커질수록 권세를 부리는 요승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 또한 높여졌다. 하지만 편조를 절대적으로 신임한 공민왕은 그를 진평 후에 봉하고,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 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라는 긴 이름의 최고 관직을 제수했다. 최고 관직에 오른 후 여태 써 온 편조라는 이름을 버린 신돈은 공민왕 15년 5월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이 기구를 통해 그는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강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은 면천시켜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감행했다. 이에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으로 치켜세우며 크게 환영했다. 이듬해에는 숭문관 옛 터에 성균관을 세움으로써 학문을 진작시키고자 한 공민왕의 뜻을 받들었다. 그리고 관리의 근무 일수를 진급 기준으로 삼는 순자격제를 실시해 당시 잦은 변란으로 군공이 높아지던 무장 세력들도 견제했다.

 

신돈의 위세가 나날이 커지면서 관리들이 궁궐 대신에 그의 집으로 찾아가 국사를 처리하는 상황들이 전개되었다. 이제현은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할 것을 간청했다. 이에 분노한 신돈은 이제현의 문도들이 출사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과거시험을 폐지해 버렸다. 또한 자신을 탄핵하려 시도한 간관들을 내쫓았으며,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한 이들은 장을 쳐서 유배를 보내거나 살해했다. 그런데도 비난하고 배척하는 움직임이 잦아들지 않자, 신돈은 <도선비기>를 근거로 삼아 공민왕에게 천도를 권유했다. 공민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신돈은 공민왕 18년 지방의 실력자에게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은 5도 도사심관이 되어 세력을 키우려 했다. 하지만 사심관 제도의 부활도 공민왕의 반대로 좌절되자, 신돈은 왕의 신임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역심을 품게 되었다. 공민왕 20년 7월에 왕이 헌릉과 경릉에 거둥할 때를 거사일로 잡은 신돈은 은밀하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던 중 역모 사실이 드러나 붙잡힌 그는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수하들과 함께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