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한성, 웅진, 사비시대의 백제

유주사랑 2020. 6. 21. 13:09

제8대로 즉위한 고이왕은 재위 27년 봄에 대대적인 관직 제도 정비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6 좌평을 두어 국정을 분담케 하는 한편, 관직을 16품으로 나누고 복색을 달리해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대외적으로는 신라의 변방을 자주 공략해 영토확장에 힘을 쏟았다. 제13대로 즉위한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 데 매진했다. 재위 24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침공해 오자 이를 물리쳤으며 2년 후에는 반대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의 지도력과 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영토를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와 함경도 일부까지 확장한 백제는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고이왕

영토 확장에 매달린 근초고왕은 역사서 편찬에도 관심을 기울여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만들게 했다. 고구려는 영양왕 때 이문진이 <유기>를, 신라는 진흥왕 당시 거칠부가 <국사>를 쓰는 등 삼국이 모두 역사서를 편찬했다. 근초고왕의 치세로 백제는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재위 30년 가을에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지금의 황해도 신계 지역인 수곡 성이 함락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에 보복 공격을 준비하던 근초고왕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해 겨울 죽음을 맞았다. 백제의 참담한 시련은 21대 개로왕 때 있었다. 재위 21년에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한성을 빼앗긴 데다 적에게 사로잡혀 죽임까지 당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100여 년 전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죽은 고국원왕의 복수를 한 셈이었다.

 

고구려의 복수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군사 작전에 앞서 승려 도림을 첩자로 내려 보냈다. 도림은 바둑을 좋아하는 개로왕에게 접근해 신임을 얻은 다음, 왕을 꾀어 새로 궁궐을 짓고 성을 쌓게 만드는 등 각종 토목공사로 백제의 국력을 소진시켰다. 이처럼 주도면밀한 고구려의 침공 앞에서 백제는 속수무책이였다. 멸망 위기에 처한 백제 왕실을 구한 것은 일찍이 고구려 침략에 대비해 비유왕 7년에 체결한 신라와의 나제 동맹이었다. 개로왕 21년, 위급한 상황에서 부왕인 개로왕의 명을 받은 문 주는 신라로부터 1만여 명의 원병을 얻어왔고, 고구려군은 공세를 멈추고 물러갔다.

한성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의 목책

이미 왕이 죽고 한성도 파괴된 참담한 상황에서 제22대로 즉위한 문주왕은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새로 옮겨간 도읍은 외부로부터 접근하기 힘든 지형이라 확실히 안전은 했지만, 그만큼 밖으로 진출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일국의 수도로 삼기에도 협소했다. 이처럼 급박하게 이루어진 문주왕 원년의 천도로, 백제는 성왕 때 다시 수도를 옮겨 가는 수고를 하게 되었다. 웅진이 백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중심지로 구실한 것은 문주왕부터 삼근 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까지 5대에 이르지만, 그 기간은 65년에 불과했다.

문주왕

천도 직후 병권을 가진 신하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는 등 어수선한 가운데, 동성왕은 제 24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지방의 유력한 세력들과 연대하면서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는 한편, 재위 15년에는 신라의 왕족인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해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정국이 안정을 찾게 되자, 방심한 왕은 차츰 정사를 멀리하고 향락을 즐기다가 자신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품은 신하에게 살해되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성왕은 재위 16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등 국가체제를 다시 정비했다. 이를 통해 국력을 키운 성왕은 고구려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부왕 때처럼 중국의 남조와 긴밀히 교류하고 신라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신라의 힘이 부쩍 세어지면서 양국의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성왕 28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상대의 도살성과 금현 성을 점령하자, 신라 진흥왕은 양국 군사들이 지친 틈을 노려 두성을 탈취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백제의 국경을 넘어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가 하면,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을 빼앗았을뿐더러, 옥천 지역인 관산성까지 공략했다.

 

이에 신라에 대한 응징의 기회를 노리던 성왕은 이듬해인 554년 7월 신라를 기습 공격했다. 절정을 이룬 관산성 전투에서 우세를 보이던 백제군은 매복해 있던 신라군의 공격으로 성왕이 전사하자, 사기를 잃고 대피했다. 이후 백제의 주적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바뀌어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신라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면서 부왕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그리고 중국 남북조의 국가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고구려의 공격에도 대비했다.

의자왕

무왕 다음으로 즉위한 이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었다. 즉위 초기에는 나라를 안정적으로 잘 운영하면서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효심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리기도 했던 의자왕은 지방을 순행하면서 고달픈 백성들의 삶을 돌보고 죄인들을 대거 사면해 주었다. 그런 한편,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와 돈독한 외교 관계를 조성하면서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군사적 압박 속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싸움을 멈추라는 당 황제의 뜻을 수용하는 듯했던 의자왕은 재위 15년에 고구려와 더불어 다시 신라를 공격해 30여 개 성을 무너뜨렸다.

 

신라를 상대로 거둔 눈부신 승리에 도취한 의자왕은 정사를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실정이 거듭되고 폐단이 쌓이면서 백제의 국력은 날로 소진되었다. 이런 가운데, 당나라 군사 13만 명이 소정방의 지휘 아래 바닷길을 건너고, 신라의 정예 병력 5만 명이 소정방의 지휘 아래 바닷길을 건너고, 신라의 정예 병력 5만 명이 김유신을 따라 백제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 5천 명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자리한 황산벌에서 10배나 많은 산 라군과 맞서 싸웠다. 기세로 적을 눌렀으나 수적으로는 당해 낼 수 없었던 백제군이 전멸하자, 김유신의 군대는 사비성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서해를 건너온 소정방의 군대와 합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