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시조인 동명왕의 뒤를 이은 유리왕은 기원후 3년에 오늘날 중국 길림성 집안에 해당하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은 기존의 도읍지인 졸본에 비해 지리적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가 수월한 데다 기후가 온난하고 물산도 풍부한 지역이었다. 제6대 왕으로 유리왕의 손자인 태조왕은 기원후 56년에 동옥저를 정복했으며 72년과 7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소국들인 조나와 주나를 각각 정벌했다. 그리고 121년에는 8천여 명의 선비족 무리를 이끌고 요하 지역을 공략했다. 이처럼 주변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통해 태조왕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중앙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고구려는 연나부, 관나부, 비류나부, 환나부 등 4부와 왕의 출신 부인 계루부 등 이렇게 5 부족이 결합한 부족 연맹체 국가였다. 계루부에서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한 것은 태조왕 때부터였으며, 제9대 고국천왕 때는 5부가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개편되었다. 이는 각 부족의 세력이 왕의 권력 아래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정구역 정비 외에도 왕위가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는 등 획기적인 왕권 강화 정책이 고국천왕 재위 당시 이루어졌다. 제11대 동천왕 시기에는 요동지역을 둘러싼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다가 가까스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제15대 미천왕 때인 313년과 314년에는 각각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압록강 유역의 교통 요충지인 서안 평을 확보하는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설치되었던 중국의 군현을 없애버렸다.
제16대 고국원왕 재위 당시인 337년 요동 지역에서는 선비족의 우두머리인 모용황이 전연을 세웠다. 중원 장악의 야심을 가진 모용황에게 고구려는 언제든 배후를 공격해 올 수 있는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중원 공략에 앞서 고구려의 기세부터 꺾을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고국원왕 12년에 전연의 군사들이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했다. 적의 공격에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고구려는 수도를 함락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모후가 포로로 잡혀가는 등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 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미천왕의 시신을 되찾고 고국원왕의 모후도 어렵사리 귀국시키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가운데, 370년에 전연은 저쪽의 우두머리 부건이 세운 전진에 멸망당했다.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요동 지역이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 한반도의 한강 아래쪽에서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활발하게 정복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대방군이 물러간 황해도 지역으로도 손을 뻗쳐 고구려와 갈등을 빚었고 고국원왕 41년에는 고구려를 공략했다.
고국원왕은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가 평양성 근처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전연의 공격으로 큰 시련을 겪었던 고구려는 불과 30년 만에 또다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국난의 반복은 고구려가 전연이나 백제의 세력 팽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생겨난 것으로, 시급하고 효율적인 국가 체제의 정비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국왕의 죽음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왕위에 오른 제 17대 소수림왕은 여러모로 준비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재위 2년째인 372년에 전진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3년 후에는 한민족 최초의 사찰이라 할 수 있는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웠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수용한 것은 전진과의 친교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국가 비상시에 고등종교인 불교를 통해 내부적으로 사상의 통일을 도모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이러한 국가적 당위에 부응할 만큼 당시의 불교는 호국적인 성격이 강했다.
소수림왕은 불교 수입과 더불어 태학도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유학 관련 과목을 가르쳤는데, 충효 사상으로 무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교육 대상은 귀족의 자제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수림왕 3년에는 율령이 반포되었다. 건국 이래로 통용되어온 관습법을 밀어낸 이 규범은 국가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율령은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으로 율이 형벌과 관련된 형사 규정을 다루었다면 령은 형벌이 아닌 민사적인 규정을 담고 있었다. 율령의 반포와 함께 시행된 것은 공복의 제정이었다. 율령이 공법 체계의 확립에 기여했다면, 공복은 관료 제도의 정비에 보탬이 되었다. 이처럼 내정을 안정시키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소수림왕의 적극적인 개혁 조치에 힘입어 고구려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내부적으로 체제 정비를 마무리한 소수림왕은 시선을 밖으로 돌려 백제에 대한 공격에 시동을 걸었다. 서쪽에 자리한 서진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남쪽에서 급성장하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소수림왕 5년에 고구려는 오늘날 황해도 신계군 지역에 해당하는 백제의 수곡성을 침공했으며, 이듬해에는 백제의 북쪽 경계를 공략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등 양국 사이에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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