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사회를 구성하는 신분 계층은 크게 지배층과 평민층 그리고 천민층으로 나눌 수 있다. 지배층은 전쟁을 통해 정복한 땅의 일부를 식읍으로 받거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점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민층에 속하는 농민들의 경우에도 사적인 토지 소유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땅들을 가질 수 있었다. 4~5세기경,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우경의 실시 그리고 저수지와 제방의 축조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면서 농민들 사이에서도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영농민과 남의 땅에서 품을 파는 용 작민 등으로 분화가 일어났다.
백제의 조세 대상은 농민으로 그들에게는 조, 역역 등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조는 토지에서 생산된 수확물 중에서 일정 부분을 징수하는 제도이고 역역은 국방의 의무를 지는 군역과 나라나 지방에서 주관하는 토목사업 등에 일꾼으로 동원되는 부역을 가리킨다. 군역은 3년을 원칙으로 했으며, 부역은 농한기인 2월과 7월에 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세 제도의 원활한 집행과 농업 인력의 확보를 위해 백제에서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가구를 상, 중, 하로 구분했던 고구려처럼 3등호제를 실시해 백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런 한편, 신라나 고구려로 인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라의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거나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백제 문화의 중심에는 불교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불교 미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제15대 왕인 침류왕 원년동진에서 건너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사회에 불교가 처음 소개되었다. 그리고 백제 왕실은 불교를 적극 수용했다. 이처럼 순탄하게 백제로 이식된 불교는 사비 시대에 이르러 크게 번성했다. 질 좋은 화강석이 많이 산출되는 지질 특성상, 우리나라는 가람배치에서 중요한 불탑의 경우에 일찍부터 석탑 기술이 발전했다. 그 가운데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경림사지 5층 석탑처럼 주목할 만한 석탑들이 바로 사비 시대에 만들어졌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그리고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는 탑으로,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라 평가받는다. 각각 국보 제11호와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인의 솜씨가 가장 잘 녹아들어 있는 불교 미술은 바로 불상이다. 백제 불상은 부드럽게 조각된 몸체와 자연스럽게 표현된 옷 주름 그리고 잔잔하게 미소 짓는 얼굴 표정을 특징으로 한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출토된 납석제 불좌상과 금동보살입상, 부소산에서 출토된 금동 삼존불상, 서산과 태안의 자연 암벽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예산 화전리에서 발견된 사면 석불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충남 서산 용현리의 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 마애삼존불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유쾌하게 웃음 짓는 둥글고 귀여운 불상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위엄 있고 자비로운 표정을 짓는 보통의 불상과는 달리 친근한 느낌의 백제인을 보는 듯한 중앙의 본존불은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 미술 외에 건축이나 금속공예 분야에서도 백제인들은 빼어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 덴리시 신궁에 있는 백제 칠지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 그리고 같은 지역 고분에서 나온 금동제 관장식이나 금실, 금제 꾸미개 따위의 부장품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불전에서 향을 피울 때 쓰던 것으로,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리 합금에 수은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한 이 유물은 조형적 섬세함과 화려함이 탁월해 눈길을 끈다. 한편, 부장품 형태로 여러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는 백제의 무덤은 서울을 비롯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널리 흩어져 있다. 특히 한강 유역인 서울 석촌동과 구의동 일대, 공주 송산리 지역 그리고 부여 능산리 지역 등 과거 백제의 도읍지에서는 왕릉급의 무덤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백제 무덤의 조성 장소는 대체로 평지였다가 송산리나 능산리처럼 구릉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조성 방식도 바뀌어 갈뿐더러, 무덤 밖에서 안으로 연결되는 연도가 남쪽 벽의 동편에서 중앙이나 서편으로 이동하는 구조 변화도 진행되었다.
오늘날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손꼽히는 무령왕릉은 1971년 명문이 적힌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그 정체가 밝혀졌다. 일정한 크기의 벽돌을 쌓아 만든 벽돌무덤인 이 왕릉은 앞면 중앙에 연도가 짧게 마련되어 있으며, 아치형의 천장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백제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 문화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는 일본에 전파되어 그곳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삼국 중 일본과 가장 많이 교류한 백제는 불교와 유학 등 당대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고. 일본은 백제에 위기가 닥쳤을 때 군사적 도움을 제공했다. 이처럼 양국 관계는 상호 협조적인 성격이 강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수된 사례를 간략하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당시 왕명으로 일본에 간 아직기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어 한자를 가르쳤으며, 아신왕 때는 박사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했다. 당시 왕인과 함께 도공과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도 따라가서 일본 아스카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무령왕 13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가 일본의 초청으로 바다를 건너가 유학을 가르치고, 3년 후에는 고안 무와 교대하고 귀국했다. 또한 성왕 32년에는 왕류귀 등이 일본에 유학을 전파했다.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해 준 것도 백제였다. 성왕 30년에 왕명으로 일본에 파견된 노리 사치계가 금동 석가불 1구와 경론 등을 전했다. 그밖에도 성왕 때는 천문 지식을 가진 역 박사인 왕보손과 왕도량, 의학 지식을 가진 의박사인 나솔 등이 천문 관측 기술과 역법, 의학 및 백제의 여러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수했다. 아울러 무왕 3년에는 역법에 능통한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역서와 천문, 지리, 방술에 관한 책들을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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