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광개토왕, 정복 군주의 등장 그리고 장수왕, 고구려의 전성기

유주사랑 2020. 6. 18. 22:17

391년 제19대 왕으로 즉위한 광개토왕은 소수림왕이 다져 놓은 안정된 정치적 기반 위에서 대외 정복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즉위 초부터 전개한 백제에 대하 공세로 석현성과 관미성을 위시한 여러 성들을 무너뜨렸다. 이후 반격해 온 백제의 군사들을 수곡 성과 지금의 예성 강인 패수에서 연이어 격퇴하고 접경지대에 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재위 6년에는 한강 이남의 백제 왕성을 공략해 아신왕에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58개의 성과 700개의 촌락을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세력 만회를 노린 백제가 399년 왜구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략하자, 광개토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몰아냄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한 404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대방 고지를 침공했을 때도 이를 격퇴했다. 그리고 407년에는 백제를 공략해 6개의 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에 대한 저항 의지를 꺾었다.

광개토왕

이처럼 광개토왕은 남방으로의 세력 확장은 물론, 서방으로의 진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서쪽 지역을 장악한 후연과 처음에는 사신을 파견하는 등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다가 재위 10년에 후연이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하면서 평화로웠던 양국 관계도 파국을 맞이했다. 광개토왕은 후연에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402년 요하를 건너 요서의 대능하 유역까지 공략했으며, 2년 후에도 후연을 침공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하 동쪽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405년과 406년 두 차례에 걸친 후연의 반격을 물리침으로써 요하 동쪽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런 한편, 광개토왕은 북방으로도 손을 뻗어 392년에 거란을 정벌하고, 395년에도 다시 거란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비려 지방을 공략했다. 또한 398년에는 숙신을 정벌해 조공 관계를 맺었을뿐더러, 410년에는 동부여를 친히 정벌해 굴복시켰다.

 

이와 같이 왕성한 정복 활동을 전개했던 광개토왕은 22년의 재위기간 동안에 64개의 성과 1400개의 촌락을 격파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어 동으로는 북간도 혼춘, 서로는 요하 동쪽,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 북으로는 개원에서 영안에 이르렀다. 중앙 관직 신설과 제도 정비에도 힘쓰는 등 고구려를 부국강병의 반석에 올려놓은 광개토왕은 자신의 제국이 중국과 대등함을 내보이기 위해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만들어 썼다. 그의 업적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왕의 은혜는 하늘에 닿았고, 그 위엄은 온 세상에 끼쳤다. 불측한 무리를 몰아내어 누리의 백성이 생업에 힘쓰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했으며,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었다.”

 

장수왕

39세에 숨을 거둔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412년에 장수왕이 제 20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 호칭에 걸맞게 98세까지 장수하다가 숨을 거둔 장수왕은 재위 기간만 해도 여타 왕들의 수명보다 79년에 달한다. 장수왕은 즉위년에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으며, 이듬해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 지역에 6미터 높이의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재위 15년에는 통구 지방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추진했다.

 

중국에서 남방의 송과 북방의 북위가 대립하는 등 남북조 시대가 열린 가운데, 장수왕은 중국은 물론이고 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다중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서쪽 변방의 안정을 꾀했다. 그런 반면, 남쪽 변방에서는 평양 천도를 계기로 백제와 신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 연대해 433년 ‘나제 동맹’을 결성했다. 고구려와 군사적 긴장을 높여가던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북위는 오히려 이 사실을 고구려에 누설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장수왕은 군대를 이끌고 백제 공략에 나서,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붙잡아서 죽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의 원조 아래 도읍을 한성에서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하는 웅진으로 옮겨왔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고구려군

 

한편, 보호국의 입장에서 고구려와 평화 관계를 유지하던 신라는 나제동맹 이후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450년 지금의 강원도 삼척에 해당하는 실직 지역에서 고구려 장수를 살해하는가 하면 464년에는 신라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 군인 100명을 죽이기도 했다. 이에 장수왕 재위 56년에 고구려는 실직 주성을 공략해 빼앗았으며, 481년에는 호명성 등 7개 성을 함락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에 해당하는 미질부까지 치고 들어갔다. 이때 백제가 신라를 도와 고구려에 맞섰다. 장수왕은 남진정책으로 확장된 고구려의 남방 영토는 서쪽의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다. 광개토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영토를 넓히는 한편, 내정 개혁과 왕권 강화에도 힘을 쏟은 장수왕 재위 당시 고구려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