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연개소문과 수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과 멸망

유주사랑 2020. 6. 20. 21:35

전성기를 지나온 고구려는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귀족들 간의 전쟁으로 날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힘센 귀족들이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는 동안, 나라 밖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왕실 간의 혼인을 통해 동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551년에는 가야까지 합세해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장수왕의 남진정책 당시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았다. 이처럼 고구려가 귀족들을 득세로 국력을 소진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수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장수왕은 새로 등용한 신진 귀족들을 통해 구 귀족들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통치력을 키워 나갔는데, 이는 국정을 통솔하는 왕의 힘이 약해질 경우에 언제든 귀족들이 발호할 소기가 다분했다.

연개소문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활발한 대외 정복 활동을 통해 나라의 영역을 넓히면서 왕권을 강화시켜 왔다. 그러나 6세기 들어 대외적인 군사 활동이 급감하면서 덩달아 왕권도 약화되었다. 그런 반면에 점차 강력해진 귀족 세력은 연립 체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귀족회의에서 선출되고 국정을 총괄했던 대대로나 고구려 후기에 군사권을 장악했던 막리지 등은 귀족 연립 체제의 증거이자 산물로 볼 수 있다. 대대로의 임기는 3년으로, 유력한 자는 3년을 넘기기 쉬웠으며, 더 힘센 자가 나타나서 그 자리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왕은 그들의 다툼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리고 막리지는 대대로 와 달리 선출직이 아닌 세 습직이었다.

 

제27대로 즉위한 영류왕의 왕권 강화 시도와 귀족 세력의 이해가 뒤섞이면서 고구려 후기의 정세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런 와중에 권력 중심부로 뛰어든 연개소문은 여러 귀족 가문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야심가였던 연개소문은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어렵사리 막리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100여 명의 귀족들을 죽이고 영류왕까지 시해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장왕을 옹립한 다음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인사권과 군사권을 틀어쥐는 등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이는 장차 있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귀족 세력이 분열하고 망국을 초래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영류왕

중국은 581년에 남북조 시대에 혼란을 극복하고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했다. 그간 중국의 분열로 서쪽 변경의 안정을 누려 왔던 고구려는 신하의 예를 강요하는 수나라와 불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런 고구려의 화친 정책은 제26대 영양왕이 즉위하면서 바뀌었다. 영양왕 9년에 고구려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요서를 선제공격했다. 이에 수나라 문제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30만 명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토록 했다. 그러나 해로를 통한 공격이 폭풍으로 배가 침몰하면서 실패하고, 육로 공격도 평양 부근에서 고구려의 공세에 기가 꺾였다. 1차 침공의 실패 이후, 수나라는 고구려와 형식적인 평화 관계를 10여 년간 이어갔다. 그사이 새로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문제 때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200만 명의 대군을 끌어 모아 고구려를 침공했다. 영양왕 23년의 일이었다.

 

기세 등등하게 요하를 건넌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을 공략했으나, 지구전으로 저항하는 고구려군을 어쩌지 못한 채 시간과 전력을 소모했다. 그런 한편, 바닷길을 통해 대동강 하구로 접근한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외곽에서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 요동성에서 발이 묶인 수나라 군대는 30만 5천여 명의 별동대를 조직해 평양성을 진격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방어를 뚫지 못해 고전하던 별동대는 살수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살아서 돌아간 군사의 수가 2700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안시성주 양만춘과 성민들이 당 태종의 침공을 막아낸 전투 기록화

618년에 세워진 당나라는 수나라에 이어 중국의 새 주인으로 등장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와의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을 교환했다. 하지만 당 태종이 등극하고 당나라가 점점 강성해져 주변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복속해 나가자, 평화롭던 양국 관계에도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영류왕 14년에 천리장성 축조에 들어갔다. 동북쪽으로는 지금의 농안에 해당하는 부여성에서부터 서남쪽으로는 지금의 대련에 해당하는 발해만의 비사성에 이르기까지 천 리에 걸친 이 토 축성은 공사 착수 16년 만인 647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천리장성의 공사 책임자는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당나라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한편, 신라와 당나라의 해로를 연결해 주는 요충지인 당항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당의 육군이 현도성, 신성, 요동성을 차례로 격파하는 동안, 당의 수군은 비사성을 공략했다. 요동성을 점령한 당 태종은 기세 좋게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양만춘의 지휘 아래 결사적으로 성을 방어했다.

 

두 달 동안의 맹공으로도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당 태종은 점점 날씨가 추워지자 전황이 불리해질 것을 염려해 철군을 결정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난 이후, 당 태종은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고구려 정복의 비원을 품은 채 보장왕 8년에 숨을 거두었다. 고구려를 철권통치하면서 당나라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연개소문도 보장왕 24년에 눈을 감았다. 이후 연남생과 연남건, 연남산 등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벌인 내분과 귀족 세력들의 이탈로 지도력을 상실한 채 혼란을 겪던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망국의 비운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