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신라 경제 활동 및 종교와 문화

유주사랑 2020. 6. 26. 20:53

신라왕경의 월성복원도

삼국 시대에 사람들이 주로 경작한 농산물은 콩이나 조 등의 잡곡류였다. 하지만 4세기 초반부터 신라에서는 수전 농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세기에 들어와서는 벼의 생산량이 증가해 주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다. 4~5시 기경에는 철제로 만든 따비나 괭이, 삽, 쇠스랑 등의 농기구가 보급되어 땅을 깊게 갈 수 있게 되었다. 저수지를 축조해 농사에 필요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 했고, 소를 이용한 우경 농법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농사뿐 아니라 수공업 분야에서도 신라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일찍이 금이나 은, 동을 추출해 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나 일본에는 금과 은의 나라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이처럼 금속 세공 기술 외에도 명주실이나 삼실로 포를 짜는 직조 및 염색 기술 또한 높은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이는 신라 초기에 6부의 여인들이 길쌈 경기를 했던 사실에서도 짐작이 가능한데, 당시 민간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마포를 가내에서 자급자족한 것으로 보인다. 관청 수공업의 경우는 6세기경에 궁중 수공업과 관영 수공업으로 분화되어 발전했다. 수공업과 관련된 여러 관청들을 설치하고,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 제작에 필요한 원료 확보부터 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관영 수공업은 관청 관할의 공장에서 물품을 만들어 조달케 하거나, 장인들로 하여금 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바치게 하는 공부의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농업과 수공업 관련 생산물의 증가로 물품의 교환과 소비 요구도 자연스럽게 늘어난 가운데, 장방형 철 덩어리인 철정이 등장해 화폐의 역할을 하면서 신라 초기의 상업을 촉진시켰다. 소지왕 때 서라벌에 시장이 처음 개설되고, 지중왕 때도 서라벌에 동시라는 시장과 관할 관청인 동시 전이 설치되어 물자의 유통을 도왔다. 아울러 철정을 대신하는 새로운 교환 수단으로 포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가 자유로워지자, 사절단이 왕래할 때 상업적인 활동도 곁들여지는, 이른바 조공무역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당나라와도 초기부터 긴밀한 관계를 조성하면서 조공무역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상업 활동과 관련해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에 ‘시장에서는 모든 부녀자들이 물건을 사고판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법흥왕

신라는 법흥왕 8년에 중국 남조인 양나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와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법흥왕 14년에 국교로 공인했다. 이후 불교는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신라인들의 정신과 삶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건립했고, 확장된 영토를 돌아볼 때도 승려를 대동했으며, 국통 등의 관직을 승려에게 주어 전사한 군졸들을 위해 팔관회를 열고 미륵사상을 널리 퍼뜨리게 했다. 진평왕 때는 수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원광이 돌아와 만든 세속오계가 귀족의 자제들인 화랑의 중심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선덕여왕 때는 황룡사 9층 탑을 조성했는데 이는 인도에서 금이며 구리를 보내와 조성했다는 황룡사 장육존상과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진평왕의 옥대와 함께 신라와 신라 왕실을 불교적으로 신성화하고 정당화하는 세 가지 보물로 숭배되었다.

 

이처럼 숭불 정책을 취하는 한편 신라는 유교도 받아들였다. 진흥왕 순수비에서 <서경>의 구절이 인용된 것, 임신서기석에서 <서경> 및 <시경>, <예기>, <춘추좌전> 등이 언급된 것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유교의 수용은 중국과의 원활한 교류를 위한 외교적 수단이자, 왕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 수용되고 활용되었다. 불교와 유교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점차 신라 사회에 뿌리내리며 토착화 과정을 밞았다면, 신라의 건축, 특히 목조 건축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차츰 신라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 목조 건축물의 기단 형식을 잘 보여 주는 예로, 땅을 파고 흙을 다져서 이른바 굴광판축 방식이 활용된 황룡사 터를 들 수 있다.

 

신라 석조 건축물의 대표적인 예는 분황사의 모전석탑을 꼽는데,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까지 남아 있는 이 석탑의 축조 시기는 선덕여왕 3년이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높이 쌓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 받침을 마련한 다음, 벽돌처럼 작고 반듯하게 다듬은 회흑색의 안산암으로 탑신을 올렸으며,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조 건축물의 또 다른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곽이다. 제5대 파사왕 22년에 축조된 월성은 언덕 지형에 반월 형태로 흙과 돌을 혼용해서 쌓았는데, 역대 왕들의 궁성으로 쓰인 이곳은 자로 잰듯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정하는 조방제에 따라 도시가 조성된 대표적인 도성이었다.

 

분황사석탑

한편 신라의 분묘양식은 토광묘부터 석곽묘, 횡혈식 석실분, 적석목곽분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중 경주에서 확인된 대표적인 분묘는 적석목곽분이었다. 이것은 크기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으로 나뉘는데, 대형의 예로는 금관총을 비롯해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목곽을 설치하고 돌로 둘러싼 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적석목곽분은 대형일 경우에 단독 분묘이거나 쌍분의 형태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는 금관이나 귀걸이, 과대, 신발 등 장신구류를 위시해서 환두대도나 철모, 철창, 철촉 등 무기류와 다양한 토기 및 마구 등이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출토된 부장품들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인데,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이것은 말의 안장 안쪽에 늘어뜨려 기수의 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하는 물건이었다. 최근에는 천마도의 동물이 말이 아닌 기린이라는 주장이 세를 얻으면서 다시금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부장품들을 통해 확인된 신라 공예 문화의 대표적인 특성은 금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금제 귀걸이며 금제 과대는 물론이고, 천마총과 금관총, 사봉총, 금령총, 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금관은 정교한 기법과 예술적 화려함이 돋보이는 보물들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인의 재능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빛을 발했다. 경주 인왕동에 소재하는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축소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당시 천문관들이 이곳에서 혼천의와 같은 천문 관측기구와 육안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관측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 14년 당나라에서 역학을 배우고 돌아온 덕복이란 인물을 통해 새로운 역법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