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중앙 통치 기구는 당의 영향을 받아 3성 6부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3성은 중대성, 선조성, 정당성을 말하는데, 이 중에서 중대성은 국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일을 맡았고, 선조성은 신하들의 여론을 왕에게 알리거나 국왕의 조칙을 논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정당성은 행정 실무를 담당한 집행부로, 그 밑에 충부, 인부, 의부, 예부, 지부, 신부 등 6부가 설치되었다. 그밖에 중앙에 소속된 특별 관청으로, 관리의 규찰을 담당하는 중정대, 궁중 업무를 수행하는 전 중시와 종속 시 등 7개 시, 도서 관리를 맡은 문적원, 교육을 책임지는 주자감, 후궁을 관리하는 항백 국 등이 존재했다. 그리고 관리에게는 등급을 매겨 1 품부터 9품까지 나누고 이를 정과 종으로 갈라 도합 18등급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는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분할하여 통치했다. 5경은 15부 중에서 주요 거점으로 삼을 만한 핵심적인 5개 지역을 선정한 것이었다. 발해의 도읍이기도 한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를 각각 상경, 중경, 동경 등 3경으로 삼고, 오늘날 함경남도 북청 지역인 남해부와 길림성 임강 지역인 압록부를 각각 남경과 서경 등 2경으로 택했다. 나머지 10부는 5경 주위에 들어섰으며, 15부 아래에는 62주가, 62주 아래에는 다시 200~250개 정도의 현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군사 제도는 국민개병제로, 강력하고 잘 조련된 상비군 10만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군으로는 10위가 존재했는데, 좌우 맹분 위와 좌우 웅위, 좌우 비위, 남북 좌위, 남북 우위 등으로 구성되었다. 지방에 설치한 군부로는 절충부가 있었는데, 15부의 각 부에는 절충 도위를 비롯해 좌우 과의 도위, 별장, 장사 등을 두어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또한 촌락 단위에서는 촌장을 지휘관으로 삼고 촌락민을 병사로 하는 병농 일치의 군사 조직이 가동되고 있었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교섭과 대립을 교대로 반복하면서 전개되었다. 먼저 발해 건국 초기에는 남북 간에 교섭이 이루어져 20여 년 동안 평온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고왕 말기인 713년에 신라가 양국 접경지역인 개성에 성을 쌓으면서 대립 관계로 돌아섰다. 제2대 무왕 시기에는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개입해 췌방을 놓는 사태가 벌어졌다. 뒤이어 문왕 때는 발해가 일본과 손잡고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는 등 양국의 대립 관계가 60여 년간 지속되었다. 얼어붙은 양국 관계를 녹인 것은 신라 하대의 복잡한 정세였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와 천재지변으로 위기에 처한 제38대 원성왕이 내정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41대 헌덕왕 때도 같은 목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 양국 관계가 대립에서 교섭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유지된 양국의 봄날은 발해의 영토 확장 정책과 신라의 대당 친선 정책이 충돌하면서 급랭했다. 이런 양국 관계에 또 다시 교섭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10세기에 들어서였다. 당시 거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발해는 여러 나라들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신라와의 친교는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발해는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대결과 교류 사이를 오고 갔다. 건국 후 고왕 대조영은 돌궐 족과 연합해 당을 견제했는데, 재위 8년 당에서 사신을 보내고 발해 건국을 인정하는 등 전향적 자세를 보이면서 양국 관계가 개선되었다.
그 후 고왕은 자신의 재위 16년에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을 받아, 국호가 진국에서 발해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책봉 지위가 국왕이 아닌 군왕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발해를 하나의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았던 당의 인식을 보여 준다. 무왕 때는 당에 접근하는 흑수말갈을 정벌하는 문제로 왕과 대립하던 동생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면서 양국의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당이 흑수말갈을 동원해 발해 침공에 나서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던 무왕은 대문 예를 비호하는 당의 태도에 반발해 재위 14년 산둥반도의 등주를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악화된 양국 관계에 다시금 반전의 계기가 되어 준 것은 755년 발발한 안사의 난이었다. 763년까지 이어진 이 난을 수습하기 위해 발해의 도움이 필요했던 당나라의 문왕 26년에 그간의 적대적이고 오만한 자세에서 벗어나 발해왕을 군왕에서 국왕으로 고쳐 불렀다.
등주 공격이 있기 5년 전인 무왕 9년,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로써 시작된 양국 관계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측면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일본 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발해 사신이 일본에 파견된 목적은 신라 침공에 필요한 일본의 군사적 원조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발해의 사신이 일본을 방문한 것은 군사적인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초빙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당시 내부적으로 집권 위기에 빠져 있던 일본의 지배층이 권력의 정당성을 선전할 목적으로 대외 사절을 활용했다고 보아야 타당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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