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견훤과 궁예의 활약, 왕건과 후삼국 통일

유주사랑 2020. 7. 4. 20:08

견훤

9세기 말부터 신라는 혼란이 거듭되었다.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은 방탕해졌으며 권력 다툼이 심해지고 국가 재정은 궁핍

해졌다. 이 틈을 노려 지방 호족 세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행정권, 군사권 등을 손아귀에 넣은 자들이 성주나 장군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견훤과 궁예다. 견훤은 후백제를, 궁예는 후 고구려를 각각 세우고 망해 가는 신라에 저항했다. 이 시기가 후삼국 시대이다. 궁예가 공포 정치로 실덕하고 민심을 잃자 왕건이 거병해 대신 왕위에 오르고 고려를 건국한다. 이때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고려로 망명해 오고, 신라도 고려에 귀부 하자 태조 왕건은 후백제 정벌에 나서 후삼국 체제를 종식시키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고려는 고대 사회가 끝나고 중세 사회로 나아간 시대로, 475년간 지속되면서 찬란한 문화유산과 대외업적을 이끌어 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국가 운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고려는 고려청자, 금속활자, 고려불화, 팔만대장경 등으로 ‘코리아’를 세계에 처음 알리기도 했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유달리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대륙의 정세가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원과 명의 변덕스러운 중원 진출은 상대적 약소국인 고려의 압박을 가중시켰다. 무신정변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력이 쇠퇴해진 와중에 신진 사대부 정도전과 신흥 무인 세력 이성계가 결합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궁예

삼국을 통합한 후 1세기 동안 융성했던 신라에 위기가 닥친 것은 9세기 말경부터였다. 화랑의 정신이 퇴색하고 골품제가 흔들렸으며, 중앙의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취하고 국가 재정은 부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 시대를 기점으로 반란 사건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150여 년 동안에 임금이 스무 차례 이상 바뀌었을 정도로 정국이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 때문에 제52대 효공왕 때는 경주 일원만 겨우 지킬 수 있을 만큼 신라의 국력은 약화되었다. 이처럼 중앙 권력이 휘청거리는 동안, 지방 호족들은 점점 세력을 키워 성주나 장군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관할 지역의 행정권과 군사권, 정세권을 독점하면서 더욱 성장한 결과 나라까지 세우는 실력자들이 등장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과 후 고구려를 세운 궁예인데, 이들의 활약으로 신라 말기 후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견훤은 지금의 경북 상주 지역인 사불성을 근거로 세력을 얻어 장군이 된 아자개의 아들로, 신라 서남해 지역 방위에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진성여왕 6년에 신라에 반기를 든 그는 주변 성들을 점령하고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차지했다. 그리고 효공왕 4년에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에 입성해 후백제 건국을 선포했다. 궁예는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 안 왕의 서자이거나 제48대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들이 있다. 한때 승려 생활을 했던 궁예는 북원의 도적 양길의 수하가 되어 활약했는데, 용맹과 후덕함으로 인심을 얻어 빠르게 세력을 키워 나갔다. 부하로 들어온 왕건을 통해 신라의 북쪽 변방 지역을 장악한 후, 효공왕 5년에 송악을 수도로 삼아 후 고구려를 세웠다. 효공왕 8년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태조왕건

궁예 밑에서 성장한 왕건은 송악 지방 호족인 왕융의 아들로, 그의 나이 19세 때 왕융이 한강 일대까지 진출한 궁예 세력에 귀부하면서 자연스레 궁예의 부장이 되었다. 그는 지금의 광주를 비롯해 충주와 경기도 남양 지역인 당성, 청주, 괴산 지역인 괴양을 점령하는 등 연전연승하면서 궁예의 신임을 쌓아 갔다. 그리고 효공왕 7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서해를 따라 남하해 지금의 나주 지역인 금성 일대를 평정했다. 아울러 남해의 진도까지 점령함으로써 견훤 세력이 남쪽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궁예의 세력 강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왕건은 이인자인 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한편 철원으로 천도한 궁예는 자신의 힘을 과신해 미륵불을 자지 하면서 충성이 의심 가는 신하들을 죽이고, 부인과 두 아들까지 살해하는 등 공포 정치를 일삼았다. 이에 왕건은 대외 원정을 구실 삼아 나주에 은거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918년 6월 14일, 왕건은 날로 심화되는 궁예의 폭정에 반감을 품은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거병하고 궁예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다음 날 왕위에 올랐다. 국호를 고려로 정한 왕건은 이듬해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다시 옮겨 왔다. 태조 8년에 고려와 후백제는 조물성 전투로 맞붙었다. 이때 견훤의 외조카인 진호와 태조 왕건의 종제인 왕신을 서로 인질로 주고받으며 휴전했는데, 이후 인질 진호가 병사하자 견훤은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문으로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방어 자세만 취하던 왕건은 이듬해인 927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웅진을 공략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그러면서 지금의 진주 지역인 강주 쪽에도 군사를 보내 공격했는데, 이는 강주와 나주를 연결하는 해상 세력권을 구축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수행한 작전이었다.

후삼국 통일

태조 10년 9월, 고려와 가깝게 지내는 신라를 급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사로 잡아 자결케 만들었다. 경애왕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부를 새 왕으로 세운 견훤은 팔공산에서 왕건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힘의 우위를 보인 견훤은 928년 11월 지금의 경북 군위 지역인 부곡 성을 공략했으며, 이듬해에는 지금의 경북 의성 지역인 의성부와 안동 풍산읍 지역인 순주를 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 또한 그해 12월에는 지금의 안동 지역인 고창군 공격에 나섰다. 태조 13년 정월, 고창군 병산에서 견훤과 충돌한 왕건은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창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후백제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게 되었을뿐더러, 경애왕 사후 후백제에 기울었던 신라를 다시 고려 쪽으로 당겨올 수 있었다.

 

고창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후백제에서는 내분이 생겨, 태조 15년 견훤의 심복 중 하나인 장군 공직이 고려에 투항했다. 그리고 태조 18년에는 넷째 아들에게 양위하려는 견훤의 결정에 반발한 큰아들 신검의 무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견훤을 김제의 금산사에 유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해 6월, 금산사에서 빠져나온 견훤이 고려 영역인 나주로 망명하자, 태조는 그를 상부로 대접하면서 한강 이북의 서울 지역인 양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견훤의 망명 소식에 신라 경순왕은 천하의 대세가 고려로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고려에 귀부 했다. 이에 태조는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936년 9월, 신라를 합병한 고려 태조는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신검의 군대도 북상하여 지금의 선산 지역인 일선군에서 고려군과 맞붙었다. 이때 후백제군은 상대 진영에서 견훤이 모습을 드러내자 크게 동요했고, 고려군의 공세에 밀려 5천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패주 했다. 오늘날 대전 식장산인 탄령을 넘은 신검은 지금의 옥천 지역인 마성까지 쫓기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로써 후백제는 견훤이 거병한 지 45년 만에, 또한 왕이 되고 2대 36년 만에 패망했다. 궁예 축출 19년 후, 태조 왕건은 나이 60세에 이르러 후삼국 체제를 종식시키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