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서쪽과 남쪽 지방 사람들이 주로 농사를 지었다면, 동쪽 지방 사람들은 농사 외에도 어업이나 수렵, 목축 등에 종사했다. 그리고 북쪽 지방 사람들은 주로 어업이나, 수렵, 목축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처럼 발해는 지역별로 생활 방식에 큰 차이를 보였다. <신당서> 중 발해전의 기록에 따르면, 발해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는 태백산의 토끼, 부여부의 사슴, 막힐 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남해부의 곤포, 용주의 명주 등이 있었다. 발해의 주요 교역 상대국은 당, 일본, 신라였는데, 왕실이나 귀족 등이 주도하는 공무역이 대세를 차지했다. 그런 가운데 사무역이 일정 범위 안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지형적 특성상 생산물이 풍성하지 않았던 발해는 타국과의 교역에 힘을 쏟았다.
당나라와의 교역은 서경압록부에서 출발하는 바닷길과 장명부를 거쳐 당의 영주로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수출한 물품은 호랑이, 표범, 곰, 담비, 토끼, 쥐 등의 가죽에다 인삼, 우황, 사향, 꿀 등의 약재, 고래, 매, 말, 양, 포, 구리 등이었으며, 수입 물품은 비단 면, 명주, 금제 및 은제 그릇 등이었다. 일본과의 교역은 상경 용천부에서 시작해 동경용원부를 통과한 후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남단 포시에트 만에서 바다를 건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수출한 물품은 호랑이 표범, 담비 등의 가죽과 인삼, 꿀 등의 토산물, 그리고 당에서 수입한 물품이었으며, 수입한 물품은 명주, 면, 포, 실, 황금. 수은 등이었다.
신라와의 교역은 견직물 등 일정 물품만 이루어졌는데, 주로 동경용원부에서 출발해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의 동북 변경으로 이어지는 길을 통했다. 그리고 민간 상인들의 경우에는 서경 압록부에서 출발해 신라의 서북 변경으로 들어서는 길을 즐겨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계와 다수의 말갈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분 계층은 왕을 포함한 왕족, 귀족, 평민 그리고 하층민인 부곡과 노비로 나뉘었다. 평민의 경우 말갈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그들을 대표하는 촌장은 토인, 즉 고구려인이 담당했다. 예외적으로 건국 과정에서 활약한 말갈인의 경우에는 고구려인에 준하는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았다.
큰 촌락의 우두머리는 도독, 그보다 작은 촌락은 자사, 또 그 아래 촌락은 모두 수령이라 불리었다. 수령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농산물이나 특산물의 공납, 축성이나 능묘 축소 사업에 필요한 인력 동원 등을 담당했다. 또한 촌락민으로 구성되는 군대 조직의 지휘관 임무를 맡기도 했다. 발해의 혼인 풍습으로는 창혼이 있었다. 이는 신붓감을 탈취하여 도주하는 일종의 약탈혼으로, 말갈족과 같은 유목민족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풍습이었다. 지배층인 고구려계 주민들의 혼인 방식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데, 옛 고구려의 풍습을 그대로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혼인 관계는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다. 발해의 주거 양식은 왕의 숙소에서부터 일반 평민의 가옥에까지 온돌 난방 시설이 발견되었다. 온돌의 발견은 발해가 고구려의 생활문화를 계승했음을 보여 준다. 왕족과 귀족의 경우는 중앙의 궁궐처럼 유약을 칠한 화려하고 넓은 건물에서 살았으며, 일 반민의 경우는 반지하식이나 지상식 주거지에서 생활했다.
발해에서 불교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제3대 문왕 때였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문왕의 존호도 불교식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존호 중에서 ‘대흥’과 ‘보력’은 당시 쓰던 연호이고, ‘효감’은 효와 관련된 유교 용어이다. ‘금륜’과 ‘성법’은 불교 용어인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 상인 전륜 성 왕에서 나온 것들이다. 불상의 양식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여, 상경 용천부 지역에서 발굴된 불상은 관음상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를 통해 과거 이곳에서 관음신앙이 번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서경 압록부와 동경용원부 지역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주로 발굴되었다. 이는 법화신앙이 세를 얻었음을 보여 주는 유물들이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학생들을 보내 고금의 제도와 학문을 익히게 했다. 또한 학생 외에 왕족의 후에도 당나라에 파견해 숙위로 장기간 체류케 하면서 그곳의 선진 문물을 습득하게 했다. 이렇게 당나라에서 수입한 선진 문물 중에서 유학과 문학은 발해의 지배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유학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제도와 질서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면, 문학은 국가를 운영하는 귀족들의 소양을 높이는데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발해의 그림으로는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 안쪽 널길과 널방 벽면에는 12점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데, 무사와 시위, 내시, 악사, 시종 등의 그림을 통해 당시 궁중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삼릉둔 2호묘의 널길과 널방 벽면 및 천장에는 인물상과 함께 꽃도 그려져 있다. 벽면에 그려진 15점의 인물상은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고, 꽃의 경우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이 돋보이는 꽃 그림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편, 발해의 공예품으로는 조각을 비롯해 도자기, 기와, 벽돌, 금속 세공품 등이 발굴되었다. 그중 조각의 경우는 불상과 석등, 돌사자상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도자기의 경우는 유약 처리 기술과 사기그릇이 눈길을 끈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 중에서 세 가지 유약을 발라 구워낸 발해 삼채가 유명하며, 사기그릇 가운데에서는 무게가 가벼운 순 자색 자배기가 당대의 뛰어난 도자기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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