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과업을 완수한 태조 왕건이 새롭게 맞이한 숙제는 호족들을 관리하는 문제였다. 그가 호족들을 회유하고 억압하기 위한 정책으로 선택한 것은 혼인 정책과 사성제도, 사심관 제도, 기인 제도 등이었다. 태조는 호족 출신 관료들의 딸을 비로 맞아들임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굳건히 했다. 그 결과 29명이나 되는 후비를 두게 되었다. 또한 왕 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 정책으로 유력자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고려로 귀부 한 신라 경순왕 김부와 같은 공신들에게 출신 지역을 다스리는 사심관 직위를 주어 지역 내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통제했다. 아울러 지방 세력가의 자제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지방을 견제하는 볼모로 삼는 기인 제도를 운용했는데, 이는 신라의 상수리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태조는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고구려 고토 수복을 위한 기지 건설이라는 목표는 서경 경영의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실제로는 왕권 강화용 정책이었다. 서경은 개경의 호족세력을 누르고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은 호족 세력의 성장과 발호를 막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코자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그리고 후대 왕들에 대한 당부를 담은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그 안에는 불교에 대한 존중과 태조 본인의 풍수지리적 믿음이 반영되었다.
943년, 태조에 이어 제2대 왕으로 즉위한 혜종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이 한미 해 뒤를 받쳐 줄 외척세력이 없었던 혜종은 태조의 신임과 최고 관직인 대광을 지내며 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박술희의 후견으로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재위 기간 동안 혜종의 권좌를 위협했던 인물은 그의 장인인 왕규였다. 태조에게도 딸을 둘이나 시집보내 외손자까지 본 왕규는 장차 외손자인 광주 원군을 왕위에 앉힐 욕심에 혜종의 이복형제들을 반역자로 참소했다. 하지만 혜종이 형제들에 대한 처벌을 꺼려 하자, 이번에는 왕을 시해하려 들었다. 그런 왕규를 혜종은 처벌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태조의 장인이자 자신의 장인이라는 이유를 내세웠으나, 감히 처벌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당시 왕규는 대광으로 병권을 거머쥐고 있어 그 위세가 막강했던 것이다.
이후 거듭된 시해 사건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혜종은 병들어 눕게 되었고, 재위 2년인 945년 9월에 숨을 거두었다. 후계좌도 정하지 않은 상태로 혜종이 죽자, 공석이 되어버린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승리해 왕으로 즉위한 인물은 왕규의 외손자가 아닌, 혜종의 이복동생 정종이었다. 고려의 세 번째 왕인 정종은 태조 왕건의 둘째 아들로, 왕규가 광주 원군을 왕으로 앉히려 참소와 시해 공작을 벌이고 그 때문에 왕이 병석에 눕자, 왕권을 탈취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이 들어갔다. 혜종의 이복형제인 정종 등을 반역자라고 주장한 왕규의 참소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더라도 혜종으로서는 왕위를 노리는 동생들을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세력이 미약했던 것이다.
왕규가 한창 음모를 꾸미는 사이, 정종은 서경에 나가 있는 왕식렴과 손을 잡았다. 태조 원년에 서경의 책임자로 임명된 왕식렴은 황폐해진 시설들을 보수하고 성을 새로 쌓는 등 서경 정비 임무를 27년간이나 수행했다. 그러면서 강력한 군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정종과 뜻이 통한 왕식렴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혜종이 죽은 당일 정종은 왕식렴의 서경 세력에 눌린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왕규는 반란을 도모했고, 왕식렴의 군대에 패해 지금의 강화인 갑곶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죽임을 당했다. 개경의 호족 세력을 대표하는 왕규의 무리를 제압하며 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곳곳에 포진해 있는 개경 세력의 만만찮은 반발에 부닥쳤다. 이에 정종은 자신의 치세에 방해가 되는 인사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즉위 초에 벌어진 유혈 사태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 전력을 두고두고 정종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정종이 선택한 것은 서경 천도였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있는 서경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도 일신하자는 복안이었다. 947년 서경에서는 정종의 명으로 궁궐 공사가 시작되었다. 서경 천도로 직격탄을 맞게 된 개경 호족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으며, 대규모 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도 날로 높아졌다. 이처럼 무리하게 추진되던 천도 작업은 정종 4년 1월 왕식렴의 사망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그리고 3월에는 정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서경으로서의 천도 계획은 완전히 좌초되었다.
광종의 개혁 정책들을 뒷받침해 준 것은 쌍기를 위시한 귀화인, 과거제도를 통해 출사한 관료, 신라계 인물 등이었다. 이와 같은 비주류 신진 세력들이 중심이 된 일련의 개혁 작업으로 점점 특권적인 지위를 잃고 있던 공신 세력은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광종 11년에 권신인 준홍과 왕동 등이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참소되어 귀양을 가면서 공신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한번 불기 시작한 피바람은 광종이 죽기 직전인 975년까지 그치지 않았다. 광종의 공포 정치는 공신 세력을 제거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에 따른 혼란과 증오심은 적잖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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