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칠대실록의 편찬과 천리장성의 축조 및 문종의 개혁정치

유주사랑 2020. 7. 11. 13:18

1009년 2월,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현종은 궁녀의 수를 크게 줄이고 음악을 가르치는 교방을 없애는가 하면, 궁궐 안에 가둔 진귀한 새와 짐승 따위를 방생하는 등 사치스러운 궁중 분위기를 쇄신했다. 억울하게 갇힌 백성들을 풀어 주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했을뿐더러 특권층들의 사치를 위해 복무하는 기술자들을 귀농시키는 등 민생구제에 힘썼다. 또한 성종 때 폐지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거나 대장경의 제작에 착수하는 등 호 불적인 성향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친유 교적 정책에도 관심을 쏟아 최치원 등 선유들을 배향하는 의례를 만들었고, 재위 16년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났을 때 읍을 하거나 말에서 내려 돌아서 가게 하는 등 품계의 높낮이와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른 문무백관의 상견례를 정했다.

 

천리장성

 

현종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칠대실록>의 편찬이었다.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사초가 소실되자, 현종이 최항과 최충 그리고 황주량 등에게 명하여 제작한 것으로, 1013년에 시작해서 1034년에 완성했다. 이후 고려는 각 왕대마다 실록을 만드는 전통이 생겼으며, 이는 조선으로 이어졌다. 1031년 현종이 죽고 제9대 왕으로 즉위한 덕종은 부왕 때의 중신들을 등용해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거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고려인 포로들의 송환을 요청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교를 단절해버렸다. 이로써 자신의 재위 내내 거란과 군사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한 덕종이지만, 여진과는 친밀하고 협조적인 관계를 이어 나갔다.

 

한편, 덕종은 교육 제도 개선을 위해 국자감에 시험 제도를 도입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명문가 자제라면 누구나 쉽게 입학해 온 국자감은 덕종의 조치 덕분에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현종 때 착수한 <칠대 실록>의 편찬을 완수했으며, 죄인들에게 부과된 형벌을 줄여 주기도 했다. 1034년 9월, 재위 3년 만에 덕종이 아들 없이 죽자 아우인 정종이 제10대 왕으로 즉위했다. 정종은 나라 안에 사면령을 내리고, 원로 중신들을 통해 정치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거란과의 관계도 덕종과 달리 타협책과 강경책을 병용했다.

 

재위 4년 거란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했고, 재위 10년에는 압록강 어귀에서 함경남도 동해안으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공했다. 이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고려는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평화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정종은 대외적인 안정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도 고려 사회를 안정시킬 정책을 추진했다. 재위 5년 노비 종모 범을 만들어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으로 상속되게 했고, 이듬해에는 도량형의 규격을 정비해 세금 수취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재위 12년에는 상속이 적자에서 적손, 형제, 남손, 여손의 순으로 이어지는 장자 상속법을 제정했다. 같은 해 3월, 정종은 도성 안 저자에서 승려들이 염불을 외면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경행을 열게 했다. 매년 개최된 이 의식은 본래 사찰에서 좌선하거나 병을 다스리기 위해 행하던 것으로, 불가의 한 수행법이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행사라 할 수 있다.

 

정종

 

1046년 5월, 정종은 이복동생 문종에게 선위하고 죽었다. 문종은 덕종과 정종 연간에 이룩한 대내외적인 안정 기반 위에서 무려 37년동안 치세 하며 업적을 쌓았고, 이 시기 고려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문종의 개혁 정치는 형법을 위시한 법률 정비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종 3년 공음전 시법을 마련해 5품 이상 관료들에게 상속 가능한 토지를 지급하기 시작했으며, 재면 법과 답험 손실 법도 제정해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경우에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게 했다. 문종 16년에는 억울한 처벌을 막기 위해 삼복제, 즉 삼심제도를 만들어 죄수를 심문할 때 3명 이상의 형관이 입회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문종 30년에는 양반 전시과를 개정함으로써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어서 녹봉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관료제의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 다졌다.

 

이와 같은 제도의 정비는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으로 이어졌다. 더는 거란의 침략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성해진 고려는 한동안 국교가 단절되었던 송나라와도 다시금 외교 관계를 재개했다. 문종 때에는 정치, 사회적 안정과 발전 속에서 불교와 유학이 두루 발전했다. 유학의 경우 해동공자라 불린 최충의 활약이 뛰어났다. 그는 퇴직 후에 사립학교인 문헌공도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이를 본뜬 사립학교들이 설립되면서 사학 12도가 생겨났다. 당시 국자감의 교육 내용이 부실했던 탓에 사학에 대한 수요는 컸다. 문종은 즉위 초에 대안사와 대운사를 증축하고, 재위 10년에는 지금의 경기도 개풍 지역인 덕수 현에 흥왕사를 세우는 등 불사에 공을 들였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둘을 출가까지 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화엄경

 

문종 19년, 11세의 나이로 영통사로 들어간 의천은 단기간에 <화엄경>을 통달할 만큼 총명했으며, 출가한지 5년 만에 승통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송나라에 유학하려 했으나, 문종의 반대로, 문종 사후에는 고려 왕자의 송나라 유학이 자칫 거란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형 선종과 신료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렵사리 유학길에 오른 의천은 송나라 땅을 주유하며 6 종파의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을 구했다. 그는 선종의 명령으로 1년 2개월 만에 귀국했는데, 이때 천여 권의 경서를 가지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