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년 숙종이 죽고 큰아들인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사면령과 내각 개편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정국을 안정시킨 예종은 여진 정벌이라는 부왕의 유지를 받들었다. 이를 위해 숙종 때의 중신인 윤관을 정벌군의 원수로 임명했다. 여진족은 완안부라는 일족이 여타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간도 지역을 장악하는 등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1103년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내분이 발생했고, 그 때문에 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1105년부터는 고려와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예종 2년 11월,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윤관은 동북 방면의 여진족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했다. 그는 100여 개의 여진족 촌락을 평정한 후 국경선을 긋는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획정한 국경선의 범위는 동으로는 화곶산, 서로는 몽라골령, 북으로는 궁한 이촌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국경선을 정한 뒤에는 화곶산에 992간에 달하는 성곽을 쌓아 웅주성이라 불렀으며, 몽라골령에는 950간의 성각을 올려 영주성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궁한이촌에는 670간의 성곽을 만들어 길주성이라 부르는 한편, 오림금촌에도 774칸의 성곽을 지어 복주성이라 명명했다.
윤관은 옹주, 영주, 길주, 복주 등 4주에다 함주, 공험진을 합쳐 모두 6성을 신축했다. 예종 3년에는 의주, 통태, 평융 등에 다시 3성을 쌓아 동북 9성의 축조를 마무리 지었다. 동북계의 옛 고구려 땅을 수복한 윤관이 9성을 쌓은 것은 여진 완안부의 남하를 막으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로 줄곧 동북 지역에서 살아온 여진족으로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생각이 없었다. 여진족은 계속해서 맹렬한 반격을 펼치는 한편, 해당 지역의 반환을 강화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고려의 반환 거부로 9성 일대에서는 격전이 되풀이되었고, 이때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윤관이 여진과의 싸움에서 패해 돌아오기도 했다.
동북계의 소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9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려 조정은 예종 4년에 여진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윤관은 무리한 정벌로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듬해 다시 복직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으나, 윤관은 정중히 사양한 채 죽을 때까지 출사 하지 않았다. 예종은 동북 9성의 운영에는 실패했지만,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는 일정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외치를 바탕으로 국학에 일곱 개의 전문 강좌인 7재를 두어 관학의 부흥을 꾀하고, 청연각과 보문각을 따로 두어 문학과 학문을 더욱 진흥시키는 등 내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예종 17년 4월, 예종이 죽고 겨우 14세밖에 안 된 큰아들 인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이 일부 중앙 관료들의 지지를 받는 숙부대방공과 대원공을 제치고 즉위한 데는 이자겸을 비롯한 인주 이씨 세력들의 도움이 컸다. 그 때문에 인종의 즉위는 이자겸의 권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자의의 반란으로 몰락했던 인주 이씨 가문이 부활한 것은 예종이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였다. 게다가 인종도 이자겸의 셋째, 넷째 딸들과 결혼하게 되면서 인주 이씨는 강력한 외척세력으로 다시 떠오를 수 있었다.
예종 당시 벼슬이 정2품 문하평장사에까지 이르렀으나 왕의 견제로 세도를 부리지 못했던 이자겸은 인종 즉위 후에는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는 대방공과 대원공 편에 서서 자신과 대립했던 세력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주위의 정적들을 제거한 후에는 숭덕부라는 최고의결기관을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정사를 주물렀다. 제 아들들을 전부 요직에 앉힌 이자겸은 매관매직과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일삼아 나날이 원성이 높아졌다. 이자겸의 계속되는 전횡에 자신이 안위마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한 인종은 최탁과 오탁 등 몇몇 무장들을 끌어들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종의 편에 선 군사들이 궁궐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자겸의 심복이자 척준경의 동생인 척준신 등이 죽임을 당했다. 뒤늦게 출동한 이자겸과 척준경의 무리는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과 격전을 벌인 끝에 궁문을 부수고 들어가 불을 질렀다. 화염을 피해 궁을 빠져나온 인종은 이자겸에 의해 사저에 유폐되었고, 최탁과 오탁 등의 무장과 그 군사들은 완전히 제압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왕당파의 쿠데타를 제압한 이자겸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왕처럼 군림하는 한편, 실제로도 왕이 될 욕심에 인종을 몇 차례나 독살하려고 시도했다. 그대마다 왕비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다시금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양측의 불화는 이자겸 집안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에게 ‘네놈의 주인은 궁궐에 활을 쏘고 불을 지른 대역죄인’이라고 욕을 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척준경은 인종의 편에 붙어 이자겸을 처단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인종 4년 5월 20일, 이자겸이 왕을 시해할 목적으로 숭덕부의 군사를 이끌고 연경궁으로 몰려오자, 급보를 받은 척준경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으로 달려와 인종을 구했다. 그는 역도들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뒤, 곧바로 왕명을 받아 이자겸을 붙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숭덕부의 장수들을 죽이고 그 잔당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척준경의 도움으로 반란을 제압한 인종은 이자겸과 그 처자며 노복 등을 모두 귀양 보냈다. 이로써 문종 이래 강력한 외척으로 왕위까지 넘보았던 인주 이씨 세력은 완전히 뿌리 뽑혔다. 한때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이자겸은 유배지인 지금의 전남 영광에서 그해 12월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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