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거란의 1, 2, 3차 침입과 서희, 강감찬의 활약

유주사랑 2020. 7. 8. 10:04

거란의 1차 침입

 

고려 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북으로는 거란과 몽골에다 심지어 홍건적의 침략에 시달리고, 남으로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에 고통을 당했다. 그중에서도 고려의 백성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거란족이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거란과 가깝게 지냈으나,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성종 때부터는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국호를 요로 바꾼 거란이 태풍의 눈으로 부상해 있었다. 중원의 송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해진 거란을 전제하기 위해 고려는 송나라와 손을 잡고 호시탐탐 북방 지역으로의 진출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나라를 제압해 중원을 차지할 야심을 품은 거란으로서는 배후에 도사린 고려를 손볼 필요가 있었다.

 

성종 12년에 거란의 동경, 즉 지금의 요령성 요양 지역 유수인 장수 소손녕이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에 고려는 각도에 군마 제정사를 파견하고, 박양유와 서희, 최량을 군 지도부로 삼아 거란을 막도록 했다. 고려 땅에 진을 친 소손녕이 군사적 공격에 앞서 항복을 요구하는 가운데, 고려 조정에서는 화친과 주전 문제로 공방이 벌어졌다. 고려의 항복을 재촉하기 위해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 지역에 있던 안융진을 공격한 소손녕은 공격이 실패하자, 다시금 항복을 종용했다. 이때 주전론을 주장하던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소손녕은 고구려 땅은 옛 신라 영토에서 건국한 고려가 아니라 거란의 소유이며, 거란과 국경을 접하는 고려가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고구려 땅을 거란에 넘기고 화친하라고 압박했다.

 

거란의 2차 침입

 

이에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이라 국명도 고려라 짓고 평양 근처에 도읍했으며, 여진족이 압록강 일대의 길을 막아 어쩔 수 없이 송나라와 사귀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므로 고구려 땅은 고려의 것이며, 여진족 문제만 해결되면 거란과의 화친도 자연스레 이루어질 거라고 설득했다. 애초 고려의 땅보다는 송나라와의 친교 정책을 공격할 목적이었던 소손녕은 화친 약속을 받아낸 데 만족하고 철수했다. 서희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물린 고려는 거란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약속하고 거란 연호를 사용하는 등 일시적인 유화책을 구사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송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양다리 외교를 펼쳤으나, 송나라가 지원을 거절하자 국교를 단절했다. 한편, 서희는 994년 군사를 몰아 압록강 동쪽 지역인 강동의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성을 쌓은 후에 흥화,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 등 6주를 설치했다. 이처럼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뛰어난 외교술 덕분에 고려의 서북 지역 경략에 도움을 주는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았다.

 

997년 10월, 성종이 아들 없이 병사하고 경종의 장자인 목종이 제7대 왕으로 즉위했다. 어린 왕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은 천추태후는 자신과 사통하는 김치양과 더불어 정사를 어지럽혔다. 급기야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 김치양이 역모까지 꾀하는 가운데, 1009년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현종을 옹립하고 목종을 시해했다. 이듬해인 1010년 11월, 고려 침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란 왕성종은 고려 왕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 지역인 구주에서 고려군에게 저지당한 성종은 군대를 몰린 후,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남하해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 지역인 통주를 공격했다. 그리고 강조를 포로로 잡아 살해했다.

 

거란의 3차 침입

 

고려 침입의 빌미로 삼았던 강조를 죽인 거란은 개경으로 진격의 고삐를 당겼다. 화친론으로 기울던 고려 조정은 강감찬의 반대로 방향을 선회하여 일단 강화를 제의해 시간을 벌고 그 틈을 이용해 왕은 남쪽으로 피신해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해 12월 현종이 개경을 떠나고, 이듬해 1월 1일 거란군이 개경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궁궐과 대묘와 민가가 불길에 휩싸였으며, 태조이래 목종까지 7대에 걸친 실록의 기록들도 소실되었다. 고려 조정의 사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문신 하공진은 거란의 성종에게 강화를 제의했다. 이미 멀리 달아난 현종을 잡아다 항복을 받기는 어렵다 판단한 성종은 후일 고려의 왕이 자신을 찾아와 문안을 올리는 조건으로 철군을 결정했다. 이때 하공진은 볼모로 잡혀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한편 개경을 떠나 계속해서 남하한 현종은 1월 13일 전라도 나주에 당도했다. 적의 퇴각 소식을 접한 후에는 1월 21일 다시 나주를 떠나 공주와 청주를 거쳐 2월 23일 개경으로 돌아왔다. 현종 3년 1월, 거란 왕은 철군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고려 왕의 친조를 요구했다. 이에 현종이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입조를 미루자, 거란은 고려의 강동 6주를 접수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그리고 현종 5년 9월에 강동 6주에 속하는 통주와 흥화진을 공략하는 것으로 3차 침입을 개시했다. 하지만 거란군은 고려군에게 패하여 곧 퇴각했고, 이후에도 파상적인 소규모 공세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현종 9년 12월 거란 왕의 사위인 소손녕이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인 침공을 해 왔다.

 

강감찬

 

20만 명의 군사를 준비해 두고 있던 고려는 평장사 강감찬을 지휘관으로 삼아 소손녕의 군대를 맞았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흥화진 앞의 강을 건널 대 막아 두었던 둑을 터트리는 수공 작전과 복병을 통한 공격으로 거란군에 타격을 입혔다. 군사를 수습한 소손녕이 개경으로 계속 진군하자, 거듭된 공격으로 전력 손실을 입히는 한편, 현지에서 보급할 만한 식량 등을 미리 치워 없애는 청야 전술을 써서 적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아울러 개경에는 1만 3천여 명의 군사들을 보내 방비를 강화했다. 마침내 개경을 앞에 두고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소손녕은 철군하기 시작했는데, 곳곳에 매복한 고려군에게 시달리다가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에 자리했던 귀주성에 이르러 강감찬과 조우했다. 격전 중에 열세를 느끼고 도주한 거란군은 추격해 온 고려군의 맹공에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른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은 고려를 함부로 넘볼 수 없게 되었을뿐더러, 고려 왕의 입조나 강동 6주에 대한 욕심도 더는 부릴 수 없게 되었다.